배우 경험 살려 대사 연기하며 집필
‘김부장’, 출퇴근자들 대한 존중 가득
소시민이 영웅 되어가는 모험극 그려
‘김부장’ 성공 후 이제야 직업 얻은 느낌
각본뿐 아니라 연출·연기 욕심도 남아
혐오 시대 극복 고민… 사회 탐구 공력
어느 평일 오후, 부엌. ‘하진’(명세빈)은 설거지를 하고 있다. 한창 회사에서 일해야 할 시각, 남편 ‘낙수’(류승룡)가 박스와 가방을 들고 무거운 표정으로 집에 들어선다. 대기업 부장으로 버텨온 그의 커리어가 끝났음을 직감한 하진은 숨을 고르고 짐짓 의연한 척 다시 싱크대로 몸을 돌린다. 깨끗이 씻은 컵을 내려놓고는 남편에게 장난을 건다. 손에 묻은 물기를 남편의 얼굴에 튀기며.
“왜 이래. 아이, 하지 마.”(낙수) 실없는 농담을 던지던 하진, 이내 팔을 벌리고 남편을 향해 말한다. “고생했다, 김 부장.”(하진) “미안해.”(낙수)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아휴.”(하진) 남편을 껴안고 등을 두드리는 하진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화제의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JTBC·‘김 부장’) 7화 엔딩 장면이다. 과장 없는 일상어로 최적의 온도를 맞춘 건 김홍기 작가의 솜씨다.
김 작가는 지난 13일 첫 화가 공개된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제4차 사랑혁명’(‘사랑혁명’) 공동각본가로도 이름을 올렸다. 수도권 변두리 ‘한강대’의 학과 통폐합으로 탄생한, ‘융테콘’(융합피지컬테크놀로지글로벌콘텐츠개발학부)이라는 해괴한 이름의 학과를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다. 학교 당국의 밀어붙이기식 통폐합 속, 컴퓨터공학과 너드 여학생 ‘주연산’(황보름별)은 ‘자바(Java)’도 모르는 모델 겸 인플루언서 ‘강민학’(김요한)과 같은 학과생으로 엮인다. 민학을 안중에도 두지 않던 연산은 점차 민학의 해사한 아름다움에 스며든다.
중년 남성의 실존을 파고든 ‘김 부장’부터 캠퍼스 로맨스 ‘사랑혁명’까지, 극단의 스펙트럼을 오가는 김 작가의 머릿속은 어떤 구조로 움직일까. 24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배우 출신 작가, 연기하며 쓴다… 울고 화내며
“모든 대사는 실제 연기를 하면서 씁니다. 진짜로 울고, 화내면서. 배우의 연기만 생각하며 써요. 제가 원래 배우로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7화 엔딩은 (‘김 부장’ 연출) 조현탁 감독님을 앉혀두고 물을 뿌리는 제스처를 하며 만들었어요.”
그는 배우 출신이다. 19세, 대학 정치외교학과 입학 후 세 번 학사경고를 맞았다.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사투리를 고치고 고향 부산에서 서울로 향했다. 내내 연기를 붙들었으나 28세, 한 연극 무대 주연으로 선 뒤 깨달았다. ‘나는 배우로서 상품성이 없구나.’
이후 구직을 시도했지만, 나이 서른에도 직업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연극 무대로 돌아가 연출 경력을 쌓았다. 웹드라마 ‘연애플레이리스트’ 연극판 작업을 계기로 윤성호 감독을 만났고, 윤 감독이 연출한 웨이브 오리지널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2021) 공동작가로 참여했다. 2023년에는 장편 독립영화 ‘익스트림 페스티벌’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가상의 지방 소도시 ‘망진군’ 지역 축제를 소재로 한 이 블랙코미디는 평단의 호평에도 4400여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그 영화를 만든 후 ‘내 개성을 끝까지 보여주겠다’는 욕심을 완전히 털어냈습니다. ‘통통 튀는 B급 감성’을 한 번에 정리했달까요.”
영화 편집을 마친 직후 송희구 작가의 원안을 각색해 ‘김 부장’ 집필에 착수했다. 카피라이터 출신으로 다년간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윤혜성 작가와 공동집필했으며, 김 작가가 메인 집필을 맡았다. 대사와 장면화에 능한 김 작가가 방향타를 잡고, 구조를 잘 잡는 윤 작가가 뒷받침했다. 김 작가는 “작중 최고파괴책임자(CDO)라는 직함과 ‘녹취’ 사건도 윤 작가의 아이디어”라고 설명했다.
◆“‘김 부장’, 소시민이 위대함에 도달하는 여정”
그는 ‘김 부장’을 ‘그다지 위대하지 않던 소시민 김낙수가 위대한 사람으로 나아가는 모험극’으로 정의한다.
1화에서 낙수는 아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다. “대기업 25년 차 부장으로 살아남아서 서울에 아파트 사고 애 대학까지 보낸 인생은 위대한 거야.”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새겨듣기는커녕 이 일장연설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김낙수는 11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요. 처음엔 스스로 위대하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지만, 마지막에는 시청자 누구나 그가 ‘정말 위대한 소시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그렸죠. 출퇴근하는 모든 이에 대한 엄청난 ‘리스펙’(존중)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웅적 일상을 인간 찬가로 쓰고 싶었어요.”
그가 특히 좋아하는 장면은 아산 공장으로 좌천된 낙수가 구내식당에서 쌍쌍바를 쪼개는 장면. 본래 낙수에게 무관심하던 공장 직원들이, 그가 구조조정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터다. 낙수가 쌍쌍바를 반듯하게 쪼개자 “축하드린다”며 너도나도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일단 쳐, 찍힐라.” 영문도 모르는 박수가 퍼져나간다. “웃픔, 그러니까 ‘ㅋㅋ’와 ‘ㅠㅠ’가 공존하는 정서를 좋아해요. 농도 짙은 블랙코미디가 잘 받아들여져서 뿌듯했습니다.”
그가 이번 작품에서 세운 원칙은 분명했다. 일상어를 쓸 것, 그리고 작정한 듯한 ‘명대사’를 만들지 않을 것. “억지 명대사는 오히려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시청자를 자연스레 무장해제시킨 뒤, 대사가 ‘훅’ 스며들게 하고 싶었습니다.”
가령 이런 대사로 말이다.
“낙수야. (…) 너 인마,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일하는 기분을 내고 있지. 일이란 책임이야. 근데 너는 아무것도 책임지고 있지 않아. 아니, 책임지는 방법도 몰라.”(백정태 상무, 6화)
“가족을 지킨다는 거, 그거 사실 나를 지키는 거야. 숭고하고 그런 거 아니야.”(김낙수 부장, 4화)
◆“‘대혐오 시대’ 고민… 차기작 서두르고파”
‘사랑혁명’에 대해서는 “제가 거의 한 게 없는 작품”이라며 “모델과와 컴공과가 통합된다는 아이디어, 캐릭터 초기 설정을 윤성호 감독의 진두지휘 하에 작업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음엔 또 뭘 보여줄까’를 이렇게 기대하게 되는 드라마는 정말 오랜만”이라며 “‘사랑혁명’ 같은 드라마를 ‘대중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 작가는 ‘김 부장’의 성공 이후 그토록 갖고 싶었던 ‘직업’을 이제야 얻은 느낌이라고 했다. 방송·영화계 러브콜이 쏟아지지만, 그만큼 고민도 깊다. 사람들의 취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읽어내기 위해 온종일 온갖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들여다본다. 그 외에 일상이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영화·시리즈 각본 집필뿐 아니라 연출과 연기 욕심도 남아 있다. 어떤 소임을 맡게 되든, 그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한국 사회 그 자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더 탐구하고 싶습니다. (작금의) ‘대혐오 시대’가 끝나려면,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도 나만큼 복잡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죠. 그게 늘 안타까워요. 드라마와 영화가 이 문제를 풀어가는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빨리 다음 작품으로 시청자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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