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노스필드, 학생자원운동의 폭발
1886년 여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의 마운트 허먼 스쿨. 251명의 대학생이 한 달간 성경 공부와 전도 집회에 모여 있었다. 한 중년 남자가 단상에 올라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음성으로 외쳤다.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드릴 용기가 있습니까? 온 세상이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가겠습니까?”
순간, 깊은 정적이 흘렀다. 젊은이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격렬한 내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미지의 땅으로 떠날 수 있을까?’ 그때였다. 한 청년이 천천히 일어났다. “저는 중국으로 가겠습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회장의 정적을 깨고 잔잔히 울려 퍼졌다.
마치 물꼬가 터진 듯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학생이 일어섰다. “저는 인도로 갑니다!” “저는 아프리카로 가겠습니다!”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뜨거운 결단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날 밤, 100명의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서약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선교의 황금기를 연 ‘학생자원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불타는 결단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2만여 명의 선교사를 전 세계로 파송했다. 그중 상당수가 극동의 작은 나라, 한국을 향해 떠나게 됐다.
◆무디와 제3차 대각성: 회심에서 성령세례로
1855년 보스턴, 한 구둣방에서 18세 청년이 가죽을 두드리고 있었다. 네 살에 아버지를 잃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란 드와이트 무디는 외삼촌 때문에 의무감으로 교회에 다녔다. 설교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고, 찬양 시간에는 입술만 움직일 뿐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상처 때문인지 하나님은 그에게 멀고 무서운 심판자였다.
주일학교 교사가 구둣방을 찾았다. “무디, 자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하네.” 그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물결처럼 무디의 마음에 밀려들었다. 견딜 수 없었다. 거리로 뛰쳐나가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고 소리쳤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자상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더 놀라운 체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그의 교회와 집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절망 속에서 무디는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성령님의 능력이 거대한 파도처럼 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너무나 충만하게 부어져서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그만 주시기를 간구해야 했습니다.”
무디에게서 두려움은 사라지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불타는 열정만 타올랐다. 그때 미국은 다윈의 진화론과 독일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의 공세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디는 깨달았다. 단순한 복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몸을 던졌다. 슬럼가에서, 전쟁터에서, 사람들의 삶 한복판에서 복음의 불씨를 지폈다. 그리고 성경 교육과 영적 부흥을 위해 무디성서학원을 세웠다. 이곳에서 그는 성경의 무오성과 근본적 신앙을 굳건히 세우며,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힘썼다. 무디의 열정은 미국과 영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세 갈래 성령운동과 사중복음의 완성
제3차 대각성운동은 마치 세 갈래 강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이었다. 무디와 R.A. 토레이가 이끈 개혁주의 성령운동은 성령체험을 거듭난 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쳤다. 피비 팔머의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완전한 성화를 위해 성령 충만을 추구했다. 윌리엄 시모어의 오순절운동은 1906년 아주사 거리에서 폭발하며 방언과 치유의 은사를 강조했다.
앨버트 심슨이 ‘사중복음’을 체계화했다. 그리스도는 구주(Savior), 성화자(Sanctifier), 치료자(Healer), 재림주(Coming King). 이는 차가운 교리가 아니었다. 심슨 자신이 만성 질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뜨거운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놀랍게도 이는 지난 세기들의 영적 여정과 완벽하게 연결되었다. 에드워즈의 ‘회심’이 구주 체험이 되었고, 피니의 ‘완전 성화’가 성화자 체험이 되었으며, 새롭게 치료자와 재림주 체험이 추가되어 완전한 사중복음이 완성된 것이다.
무디와 토레이는 무디성서학원에서 ‘성령세례는 봉사를 위한 능력’이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개인 구원을 넘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특히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믿고 ‘이 세대 안에 온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학생자원운동을 일으켰다. 마침 블랙스톤의 『예수의 재림』 같은 책들이 널리 읽히며 종말론적 열정이 불타올랐다.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로: 성령의 씨앗이 뿌려지다
학생자원운동과 무디성서학원에서 배출된 선교사 가운데 상당수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향해 떠났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게일, 모펫, 하디, 블레어... 이들의 가슴에는 무디가 심어준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깊은 절망 속에서, 이들이 전한 재림 신앙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개혁주의, 웨슬리안, 오순절. 세 갈래 성령운동이 모두 한반도로 흘러들었다. 장로교를 통해, 감리교를 통해, 성결교회를 통해. 미국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이 한국인들의 심정과 만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1903년 원산에서 하디가 자신의 교만을 통회하며 시작된 작은 불씨가 1907년 평양에서 거대한 불길로 타올랐다. 길선주 장로의 눈물 어린 회개가 터지자, 1,500명이 모인 장대현교회가 성령의 바다가 되었다. 한국적 통성기도가 그날 밤 탄생했다.
한편 무디성서학원 출신들은 일본에서도 동양선교회를 세우고 도쿄성서학원을 만들었다. 여기서 공부한 한국 청년들이 1907년 서울에 복음전도관을 열며 성결교회의 씨앗을 뿌렸다. 성결교회는 임박한 재림을 준비하며 완전한 성결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로 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성령운동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에 도달했을 때, 서구 기독교 2천 년의 신부 영성이 마침내 동방 한민족의 고유한 영성과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 시작되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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