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한쌍 제외하면 모두 1인가구
“땅이 울렁” 충격에 트라우마 여전
대다수가 노인들… 건강 상태 좋지 않아
취사 어려워 라면·빵 등으로 끼니 해결
배상문제도 겹쳐 이주까지 ‘산 넘어 산’
올여름 폭우가 집을 앗아간 이후 이재민이 된 노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경남 산청 상능마을 집단이주까지는 2∼3년이 걸릴 예정으로, 주민 11명은 산청군에서 마련한 한 모텔에서 생활하고 있다.
직선거리로는 2.3㎞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도로가 끊기면서 마을에서 모텔까지는 차로 20분이나 걸렸다. 한 주민의 방에는 종이로 만든 유등에 서툴게 쓴 글씨로 ‘집을 빨리 지어 주세요’라는 염원이 적혀 있었고, 집에서 겨우 꺼내온 옷가지 3박스와 가족사진 몇 개가 전부였다.
상능마을 인근에 있고 싶다는 주민 요청으로 산청군이 구한 모텔은 군청에서도 약 30분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다. 수해가 발생한 직후 대피소였던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텐트를 치고 지낸 주민들은 한 달여가 지나서야 모텔로 옮겨왔다. 하지만 이곳에는 식사를 해결할 식당조차 변변치 않은 실정이다. 마을에서 빠져나올 때 주민들을 태워 나른 차량 2대를 제외하곤 모두 땅밀림으로 피해를 봐 이동 수단이 마땅치 않아서다. 주민 오상우(84)씨는 “마당에 주차해 놨던 차가 순식간에 땅 밑 2m 아래로 주저앉았다”며 “꺼내올 수도 없고 폐차 처리했다”고 설명했다.
선향월(87)씨는 “4개월이 4년같이 느껴진다”며 “종일 집에 갇혀 있으니 답답하고 머리가 멍하다”고 말했다. 오씨도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할 일을 잃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땅밀림 이전엔 마을에서 깨, 콩, 배 농사를 지어 판 돈으로 생활비를 대거나 자식들이 사는 도시로 수확물을 보냈다. 오씨는 “근처에 운동할 곳도 없고, 대로변이라 산책도 하기 어렵다. 다들 몸이 안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은 모텔 사무실이었던 방에 모여 종일 대화하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김숙희(74)씨는 “화재 위험으로 조리가 어렵다. 도시락 배달을 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라며 “보통 하루 한 끼를 먹는데, 간편식이나 라면, 빵 등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창고에는 레토르트 식품, 누룽지, 컵라면 등이 쌓여 있었다.
◆“여기 있는 마을 사람들이 가족”
이곳에서 생활하는 주민 11명 중 부부 한 쌍을 제외하곤 모두 1인 가구다. 이들에겐 마을 주민이 사실상 가족이다. 오씨는 “우리는 걱정도 의논도 함께 한다”며 “거의 평생을 이 동네에서 함께 살았다”고 말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상능마을은 조성된 지 400년가량 됐는데, 700m 거리에 있는 하능마을과 같은 부락으로 친인척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수도권과 주변도시로 흩어진 자식들 집에 가기도 어렵다. 선씨는 “서울·경기, 문경에 자식들이 살고 있지만, 사업도 하고 다들 바쁜데 가서 내가 뭘 하겠나”라며 “낯선 동네에서 할 일 없이 있는 것보다 동네 사람들이랑 모여 있는 게 낫다”고 했다.
애틋한 마음이 크지만, 마을을 빠져나올 당시 상황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땅이 울렁이면서 문이 열리지 않았고, 땅속에 처박힌 자동차를 딛고 갈라진 땅을 황급히 탈출하던 당시 장면이 떠오른다고 했다. 선씨는 “지금도 집이 다 뒤집히는 장면이 생각이 나는 듯하다”고 토로했다. 김수덕(73)씨 역시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쳐다만 보고 있는데 마을을 둘러 울타리를 다 쳐놔서 갈 수가 없다”며 “어르신들께서 큰일 겪어 3개월이 지나도록 충격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A(74)씨는 불안증이 생겨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도 이유 없이 수차례 방을 드나들었다.
사람도 자원도 부족해 해결이 더뎌 주민들은 애가 탄다고 했다. 수해 복구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봉사자들이 왔지만, 현재는 일부를 제외하곤 군과 면에서 복구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수덕씨는 “최고령자는 90세로 연로하신 분들이 90%다.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 많이 든다”며 “주민 한 분은 며칠간 병원 입원치료 후에 돌아오셨는데, 입주까지 걸릴 3년을 주민 모두가 기다릴 수 있을지 걱정이다”고 말했다.
◆이주도 복구도 배상도 ‘지난한 과제’
수해가 일어난 지 4개월 지났지만, 도로는 통제돼 있었고 상수도가 복구되지 않은 마을도 있었다. 주민들은 여러 자연재해로 지자체의 손이 달릴 것을 이해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김수덕씨는 “군청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몇이나 되겠나. 3∼4개 군에서 물난리가 나서 더딜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산불이 났던 곳들은 그나마 땅이 있으니 그곳에 모델하우스나 작은 집들을 새로 지었다. 우린 땅도 밭도 묶여버려 이렇게 지낸다”고 안타까워했다.
산청군은 7월 비 피해에 앞서 올해 초 산불까지 발생해 큰 피해를 입었다.
수해는 사유시설과 주택에 큰 피해를 남겼다. 8월5일까지 국가재난안전관리시스템(NDMS)에 접수된 피해 전수 입력 결과에 따르면 집중호우 피해로 산청군에서만 공공시설 피해가 1026건(약 3800억원) 접수됐고, 사유시설은 3만3638건(약 1303억원)이었다. 이 가운데 주택 피해만 803건에 달했다. ‘역대 두 번째로 긴 산불’로 기록된 지난봄 산불은 공공시설 19건과 사유시설 2139건이 접수돼 약 216억원의 재산피해를 남겼다. 주택 피해는 37건 접수됐다.
경남도와 산청군은 2028년까지 상능마을 인근에 13가구 16명이 살 수 있는 이주단지를 조성해 입주시킬 예정이다. 현재 부지 후보 3∼4곳을 선정해 최종 개발 부지를 정하는 단계를 밟고 있다. 산청군 관계자는 당초 주민들이 원했던 부지에 대해서 “농지로 토지변경신청 등의 절차로 입주 기간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어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해 보상을 위해 마을에 남아 있는 주택과 농지 등의 가치도 측정하고 있다. 일부 주택과 농경지가 토사에 휩쓸려 내려가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 위성사진 등과 비교하는 작업을 거쳐야 해 속도가 더디다. 주민들은 조사에 응하고 있지만, 실제 손실을 온전히 보전할 보상은 불가능하다는 회의적인 시선도 내비쳤다.
김숙희씨는 “평생 농사를 짓고 일궈온 땅을 잃었는데, 돈으로 보상한다고 한들 어떻게 보상이 되겠나”라며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주를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다. 김광연 상능마을 이장은 “우리나라 연평균 강수량이 1300㎜라는데, 그 절반인 670㎜가 3일 만에 쏟아졌다”며 “몇 백년 동안 없었던 일이 생겼으니 하늘을 원망할 뿐”이라며 말을 아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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