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안보윤의어느날] 영 이상한 말

관련이슈 안보윤의 어느 날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5-04-22 23:08:26 수정 : 2025-04-22 23:08:25

인쇄 메일 url 공유 - +

느지막한 오후가 되니 학원차를 기다리는 보호자들로 아파트 입구가 북적거렸다. 마침 도착한 태권도 학원차에서 아이를 받아 안은 보호자 둘이 횡단보도에 와 섰다. 그들은 차가 떠나자마자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새로 온 선생이 예전 선생에 비해 아이들 돌보는 요령도 없고 고지식하다는 것이었다. “내내 운동만 가르치니 애들이 얼마나 재미없어 하겠어? 우리 애는 벌써부터 학원 안 다니겠다고 난리야.” 그러니까요, 하고 맞장구를 치며 다른 사람이 답했다. “사실 우리가 정말 태권도 가르치자고 학원에 보내는 건 아니잖아요.”

영 이상한 말이었다. 태권도 학원에 보내면서 그걸 가르치는 게 목적은 아니라니. 초등학생의 경우 하교 마중과 학원 등원, 하원까지 책임져 주는 학원들에 보호자가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직접 들으니 위화감이 들었다. 단지를 빠져나가는 차들 옆구리에는 영어, 수학, 미술, 음악, 수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어떤 것은 모두가 배우고 있으니 숙제처럼 배워야 하는 것일 테고, 어떤 것은 아이가 혼자 있지 않도록 시간표에 맞춰 적당히 선택된 것일 터였다.

아이들은 자기가 진짜 배우고 싶은 것을 언제쯤 배울 수 있을까. 중고등학생이 되면 입시를 목적으로 한 학원에, 청년이 되면 취업을 위한 학원에 다니기 바쁠 텐데. 어른이 되면 매일 바쁘고 피로해 좋아하는 것을 떠올릴 여유조차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 전 언니와 대화하다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올라서였다.

그때 언니는 학원 건물 주차장에서 조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카는 지난해부터 일렉기타와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두 개를 동시에 배우려다 보니 꽤 멀리 있는 학원에 다녀야 했다. 이동 시간도 강의 시간도 길어 집에 돌아오면 하루의 절반가량이 뭉텅 사라져 있었다. 그걸 꼭 지금 배워야 하나? 나는 언니에게 물었다. “어차피 취미로 하는 건데 그걸 꼭 고등학교 다니는 지금 해야 해?” 아이가 오랫동안 염원하던 것이었다고, 원하는 걸 하게 해주고 싶다고 언니가 답했지만 나는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데 드럼이나 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아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줄 수는 없다고, 부모는 어떻게든 현실적인 판단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덧붙였다. “누가 이 중요한 시기를 그렇게 낭비해? 지금은 입시에만 전념하고 나중에 하라고 그래. 대학 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그런 거짓말을 했구나. 되짚어보니 입안이 썼다.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세상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네가 하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식의 부정과 타협이 아이들의 선택지를 지워 버렸을 텐데, 어쩌면 끝끝내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이다. 아이를 걱정한답시고 ‘영 이상한 말’을 내뱉은 내가 부끄러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을 건넜다.

 

안보윤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김지연 '청순 볼하트'
  • 김지연 '청순 볼하트'
  • 공효진 '봄 여신'
  • 나연 '사랑스러운 꽃받침'
  • 있지 리아 ‘상큼 발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