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민생부터 챙겨 ‘피크 코리아’ 막아야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가 터진 직후에도 자신의 지시에 따라 임기 초부터 백악관 집무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줄 기억하지 못했다. 엄청난 분량의 녹음테이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의회가 대통령에게 제출할 것을 요구했을 때도 닉슨은 대통령 특권으로 뭉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닉슨은 테이프를 제출하게 되었고 거기에는 자신이 정점에서 모든 일을 지시했고 이를 덮기 위하여 증거 조작과 인멸 등 사법 방해를 시도했다는 전모가 남아 있었다.
닉슨은 자신에 대한 탄핵이 임박하자 사임을 택했다. 사임은 미 역사상 처음이었으나 정치사회학자 슐레진저가 닉슨을 묘사한 제왕적 대통령이란 말은 오래 남았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대통령이 내치와 외치를 다 챙겨서가 아니라 닉슨과 같이 대통령이 헌법과 법 위에 군림하며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을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압도하는 데 쓰고 정당과 언론까지 주무르는 데서 생긴 것이다.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제가 악화일로인데 윤석열 대통령이 12·3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에는 최악의 복합적 위기 상황까지 낳았다. 2022년 대선 이후 정부가 한 일이 거의 없는데 계엄 이후에는 아예 연명만 하는 중이다. 대통령은 야당과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다 결국 군을 동원하는 최악의 선택을 진두지휘했다. 체포당하지 않으려고 젊은 군인에게 총기까지 들었다 놓게 했고 헌법재판소에서는 책임을 미루거나 2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냐고 강변했다. 여야는 서로 극단적인 어깃장 정치로 세월만 보내고 있다. 양대 정당은 자기가 못 얻는 거는 참을 수 있지만 상대 정당이 얻는 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심보로 상대 발목만 잡는다.
그 사이 한국은 ‘피크 코리아’(peak Korea) 상황이다. 한국이 10대 경제 대국이었는데 어느새 성장률이 1% 미만으로 떨어졌다. 트럼프의 관세전쟁과 중국의 과학기술 도약으로 한국경제의 성장동력도 빼앗기고 있다.
제3의 민주화 물결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는 한국의 민주주의도 퇴보하는 중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2월 말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1년 사이에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추락했다. 스웨덴 예테보리대학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의 ‘민주주의 보고서 2025’에서도 한국이 전년도 ‘자유민주주의’보다 아래 단계인 ‘선거민주주의’로 떨어졌다. 이 연구소는 2023년부터 한국에서 독재화가 진행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그나마 기댈 곳은 사법부이다. 사법부가 중심을 잡고 절차와 과정을 지키면서 공정하고 상식적인 판결을 내리리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닉슨도 특검을 방해하고 위협해도 원칙적이고 독립적인 의회와 사법절차가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하지만 한국의 사법부는 일관성을 잃었다. 윤 대통령이 구속되었다가 취소되는 과정도 그렇고 검찰이 이에 대한 즉시항고를 않는 결정도 그렇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똑같은 사건에 대한 판결도 석 달 사이에 정반대다. 헌재의 선고가 늦어지는 것도 헌법과 법, 그리고 재판관의 양심이 아닌 다른 정치적 요소가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커지는 중이다.
만약 정치에 의하여 헌재를 포함한 사법부가 흔들린다면 헌재의 윤 대통령에 대한 선고를 불복하는 일이 이어질 것이다. 정치의 사법화로 정치 대신 상호 고소, 고발로 극단적이고 비타협적인 갈등이 이어지는데 사법의 정치화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은 물론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말이다. 만약 이번에 절차상 흠결을 이유로 헌재가 각하를 선고하게 된다면 헌재 무용론까지 확산될 것이다.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때 어떻게 될지 잘 몰랐던 거 같다. 실패하면 될 때까지 선포한다는 식이었다. 자신의 명령이 마이크를 타고 계엄군에게 실시간으로 전파될 줄도 몰랐다. 대통령은 겸허하게 국민 앞에 반성부터 해야 한다.
3월에 회의 한번 안 연 상임위원회가 부지기수라는 것도 말이 되나. 국회는 민생부터 챙기고 사법부도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 제 역할부터 하지 않고선 삼권분립의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없다. 피크 코리아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골든타임이다.
이준한 인천대학교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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