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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의 한국인 탈무드] 섬길 줄 알아야 신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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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1-17 23:01:13 수정 : 2025-11-17 23: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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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백성’이라는 자존감 타고난 한국인
주인의식을 건전한 에너지로 끌어내야

얼마 전 강의실에서 다소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세종이 “노비는 비록 신분은 천하지만, 그들 역시 하늘 백성(天民)”이라 말했다는 대목을 소개하자, 한 분이 그 구절이 실록 몇 년, 몇 월, 며칠 기사인지 직접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순간 ‘세종실록을 25년 연구해 온 나를 불신하는가’ 하는 서운함이 스쳤지만, 나는 시간을 들여 원문(한문)까지 확인해 드렸다.

돌이켜보면, 그분의 태도는 한국인에게서 자주 마주하는 독특한 성정과 무관하지 않다. 번거로움도 마다치 않고 스스로 확인하려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이 땅 사람들이 지닌 높은 자존의식의 한 결이기 때문이다.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세종 때 편찬된 ‘치평요람’에는 한국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여럿 실려 있다. 그중 하나가 고구려 건국시조 고주몽의 아들 유리에 관한 일화다. 유리는 주몽이 부여에 머물던 시절 예씨(禮氏) 부인 사이에서 잉태된 아들이었다. 부여를 떠나야 했던 주몽은 예씨 부인에게 “사내아이를 낳거든, 내가 남긴 물건을 일곱 모서리 돌 아래 소나무 밑에 숨겨두었다고 전하시오. 그것을 찾는다면 내 아들일 것이오”라고 당부했다.

주몽이 떠난 뒤 예씨 부인은 아이를 낳았고, 그가 바로 유리였다. 어린 유리는 놀다가 참새를 쏘는 과정에서 물 긷는 아낙네의 물동이를 실수로 깨뜨렸다. 그러자 아낙네는 “아비가 없으니 이런 못된 짓을 한다”고 꾸짖었다. 깊은 수치심을 안고 돌아온 유리에게, 예씨 부인은 “네 아버지는 부여에서 용납되지 않아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라며, 떠나며 남긴 말을 들려주었다. 이후 유리는 감추어져 있던 ‘부러진 검 조각’을 찾아내 아버지를 향해 길을 떠났고, 마침내 고구려의 제2대 왕이 되었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물 긷는 아낙에게 모욕을 당한 어린 유리에게 예씨 부인이 들려준 “너의 아버지는 임금이시다”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는 비록 ‘아비 없는 아이’라 업신여김을 받던 유리에게 자신이 곧 ‘왕의 아들’이라는 높은 자존 의식을 품게 했다. 이기동 교수는 ‘한마음의 나라 한국’에서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한 이러한 자존감을 ‘천민(天民)의식’이라 부른다.

한국인만큼 ‘피드백’을 중시하는 사람도 드물다. 부른 택시나 배달 음식이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 내가 제품에 남긴 평가 글에 기업이 얼마나 신속히 응답하는지에까지 각별히 민감하다. 나는 이것이 ‘하늘 백성’이라는 자존감, 곧 높은 ‘주인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 주인의식은 자연스럽게 투명성에 대한 강한 요구로 이어진다. ‘나를 믿고 따라오기만 하라’는 식의 지시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어느 조직에서든 리더가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했으니 믿어달라’는 태도에 머무르는 순간, 주인의식이 강한 구성원들의 마음은 서서히 멀어진다. 반대로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데이터와 근거를 분명히 제시하며, 질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리더일수록 더 큰 신뢰를 얻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세종이 말한 “하늘 백성”은 결코 추상적인 수사가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노비조차 하늘이 낸 존재로 보았던 그 시선은, 오늘날로 치면 조직의 막내 직원, 비정규직, 외주 인력까지도 하나의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리더에게 필요한 태도는 ‘나를 믿어달라’가 아니라 ‘당신이 주인이니, 당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라는 자세일 것이다.

결국 유리왕 설화에 흐르는 것은 한국인 마음속 깊은 자존감이다. 이 자존감이 참여와 책임의식으로 전환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내가 이 나라(회사)의 주인”이라는 마음을 갖게 된다. 이 내면의 주인의식을 건전한 에너지로 끌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 한국형 리더십의 핵심 조건이 아닐까.

 

박현모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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