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다자주의 문 닫는 현실
AI·인구변화 핵심의제 발판으로
美 새로운 다자트랙으로 유인해야
이달 말 경주에서 개최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주요국 정상들의 참석이 확정되었다. 의장국으로서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이들 강대국 정상의 참석이 에이펙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관건은 20년 만에 다시 의장국을 맡은 한국이 이 회의를 미·중 대결의 무대가 아닌 실용적 경제협력의 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에이펙을 둘러싼 회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실질적 성과보다는 ‘토크쇼’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아왔고, 기구화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미국부터 파푸아뉴기니까지 스펙트럼이 극도로 넓은 21개 회원 경제가 모여 초점 없는 논의만 반복한다는 지적도 있다. 트럼프 2기 들어서는 더욱이 미국이 과연 다자주의를 지속하려고 들 것인가, 미국의 의지가 식은 에이펙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론까지 제기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에이펙이 1994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발족에 산파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보자. 에이펙은 회원국을 ‘경제체(Economy)’로 칭하며 정치적 이념을 초월한 실용적 협력을 추구해 왔다. 중국과 대만이 함께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WTO 창설의 산파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실용적 접근법 덕분이었다. 관세전쟁으로 자유무역의 근간이 흔들리는 위기의 시대, 한국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무역자유화를 통한 경제협력과 성장을 추구한다는 창설 정신이 오히려 지금 시대에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2005년 부산 에이펙 이후 20년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서의 지위, K콘텐츠와 K방산으로 확대되는 소프트파워, 국제사회에서 신뢰받는 중견국으로서의 외교적 역량을 갖춘 지금, 한국은 강대국 정치의 격랑 속에서도 국제질서를 능동적으로 형성해 나갈 위치에 서 있다. 한국이 제시한 “지속가능한 내일 구축: 연결, 혁신, 번영”이라는 에이펙 정상회의 의제는 바로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현재 미국은 스스로 설계에 관여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도, 역내 핵심국이 묶여 있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 기이한 상황이다. 오히려 중국이 아태지역에서 무역자유화와 다자주의를 주도할 여지를 넓혀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국익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에이펙 고유의 ‘단계적·점진적’ 방식으로 규범을 다듬어 가며 개방의 완급을 조절하는 새 트랙을 제안하는 것은 미국이 고려할 만한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미국이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는 모범적인 무역협의체로 발전시키자는 비전을 공유하면서, 금번 에이펙에서 선언적으로라도 무역자유화의 기치를 다시 내걸고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실무 작업반을 출범시킬 수 있다면, 그간 세계 경제를 이끌었던 이 지역에 새로운 역동성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인공지능(AI) 협력과 인구 변화 대응이라는 두 핵심 의제는 21세기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직면한 공통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접근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호주, 캐나다, 싱가포르 등 에이펙과 중견국 외교에 관심이 많은 국가와의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는 것도 중요하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열리는 이번 에이펙은 다양한 문명이 만나 새로운 번영을 창조했던 개방적 정신을 21세기에 되살리는 무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도 강대국 정치의 역학과 한반도 현안을 넘어 에이펙 정신을 보여주자. 에이펙의 경제체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실용주의 외교로 중견국의 책임 있는 리더십을 실현해야 할 때다. 강대국 정치의 틈새에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중견국 연대를 통해 국제질서를 적극적으로 형성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 2025 경주 에이펙은 한국이 진정한 글로벌 책임강국으로 도약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윤정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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