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이 땅의 모든 것 들려줘
시각으론 표현 못하는 오감의 조화
그의 연주 또다른 세계 잇는 다리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 피아니스트 쓰지이 노부유키가 지난달에도 한국을 찾아 공연을 마쳤다.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 노부유키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연주로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노부유키를 처음 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고개를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에 ‘정말 이 사람이 연주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노부유키는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그동안 본 적 없던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며 완전히 다른 음악적 경험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노부유키는 어떻게 악보를 익힐 수 있었을까? 눈으로 악보를 읽을 수 없었던 노부유키는 손끝으로 점자 악보를 읽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녹음된 음악을 듣고 통째로 악보를 외웠다.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따로 녹음된 버전을 듣고 머릿속에 음악을 집어넣은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음표대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수 있다고 해서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연주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악보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작곡가들이 관찰하고 느낀 것들을 음악으로 담기 위해 그 수단으로서 악보를 쓴다. 이제 악보를 받아 든 연주자는 작곡가가 음악에 담고자 했던 것을 상상하고 해석해야 한다.
여기서 정말로 연주자에게 필요한 건 상상력과 감수성인데, 이게 노부유키에게 가장 큰 장벽이다. 상상력과 감수성은 결국 연주자 경험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부분의 정보를 시각을 통해 받아들이기 때문에 노부유키에겐 상대적으로 경험의 폭이 작을 수밖에 없다.
노부유키의 어머니 쓰지이 이쓰코는 이 과정에서 노부유키의 세상을 밝혀주려 부단히 애를 썼다.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을 통틀어 지금의 노부유키를 있게 해준 사람이기도 하다. 쉬는 날마다 미술관에 데려가 작품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고, 동네에 불꽃놀이가 있는 날이면 불꽃이 어떤 색이고 또 어떻게 색깔이 바뀌어 가는지 그 장면을 노부유키가 이해할 수 있도록 묘사해주었다. 노부유키에게 어머니는 세상을 보는 창이었다.
노부유키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감각들을 통해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게 오히려 특별한 음악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음악적 세계는 시각을 넘어, 촉각이나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이 조화를 이루며 형성되었다. 한 개인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큰 고통이지만, 덕분에 특별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의 연주를 통해 비범한 음악을 듣게 된다.
한국에 와서 연주했던 드뷔시의 ‘판화’를 듣고 나니 그 생각이 더 강해졌다. 드뷔시의 ‘판화’는 제목 그대로 시각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그중 ‘비 오는 정원’은 특히 더 그렇다. 드뷔시가 실제로 비가 내리고 있는 정원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고, 제목만 들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빗방울이 쏟아지는 정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노부유키에겐 어떨까? 그는 태어나서 비가 내리는 정원의 풍경을 본 적이 없다.
대신 그 자리엔 그만의 해석이 담겼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빗방울이 후두두 쏟아지는 대목은 그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그 순간에 느끼는 연주자의 감정이 더욱더 드러났다. 이후 날이 개며 햇빛이 다시 비치는 대목은 어떤 연주보다도 드라마틱했다. 비록 노부유키가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한 줄기 햇살을 본 적은 없었겠지만, 그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환희는 강렬했다. 마치 그가 음악을 만나 새로운 세상을 만났던 순간이 그랬을 수도 있다.
노부유키가 태어나고 3개월이 되던 12월, 이쓰코는 크리스마스트리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을 보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아들 노부유키가 평생 한 번도 볼 수 없을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노부유키는 이미 그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음악 저 멀리 너머.
허명현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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