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해야 할 장애물의 다른 말
‘포크의 아이콘’ 밥 딜런의 저항
자유를 갈망한 몸부림이었으니…
오래도록 지지해 온 감독을 인터뷰로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의 신작 영화가 갓 개봉한 상황이었다. 그날 나는 기존과는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들고나온 감독에게 조금 아쉬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반응은 예상보다 차가웠다. 상대는 상대대로, 새로운 도전보다 기존의 색깔을 찾는 나에게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 서운함이 처음엔 당혹스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내가 변화를 변절이라 단정짓고 아티스트의 달라진 창작세계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못했다는 걸. 부끄러운 그날의 기억을 꺼내게 한 건 밥 딜런 전기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이다.
“저 방의 200명한텐 각자가 원하는 밥 딜런이 있어. 뭐든 그들이 원하지 않는 거로 될 거야.”

슈퍼스타가 된 밥 딜런(티모시 샬라메)이 파티장에서 빠져나오며 하는 말이다. 그는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는 세간의 시선에 신물이 난 상태다. ‘저항 음악의 선봉장’이라느니 ‘시대의 대변자’라느니 하는 꼬리표에도 질색한다. 고정된 카테고리로 손쉽게 아티스트를 분류하려는 대중과 틀에 갇히기 싫은 아티스트의 시선이 그렇게 내내 충돌한다. 관객이 듣고 싶어하는 곡과 자신이 부르고 싶은 곡이 다를 때, 아티스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컴플리트 언 노운’은 이 질문을 파고드는 영화다.
1960년대 미국에서 포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사회운동을 담아내는 이상적인 표현 매체였고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시대에 ‘포크의 아이콘’으로 추앙받았으니 밥 딜런이 지닌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밥 딜런이 자신의 정체성을 단언하는 것들에 반감을 품었다는 점이다. 불편한 기색을 표하기도 했다. 대중과 밥 딜런 사이의 괴리는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폭발한다.
밥 딜런은 이날 통기타 대신 일렉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록을 불렀다. 포크음악을 기다리던 관중의 기대는 야유로 바뀌었고, 급기야 무대 위로 온갖 잡동사니가 날아들었다. 관객만이 아니었다. 현장에 있던 포크 뮤지션들도 밥 딜런이 포크의 순수성을 훼손했다며 탐탁지 않아 했다. 그들에게 로큰롤은 애송이들이나 부르는 상업 장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에도 밥 딜런이 록을 멈추지 않자, 누군가가 외쳤다. “(변절자) 유다!”
아티스트에게 히트작은, 뒤집어 말하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밥 딜런에겐 그를 포크 스타로 떠오르게 한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 In The Wind)’가 그랬다. 밥 딜런만이 아니다. 많은 창작자가 이러한 아이러니를 만나곤 한다. 세계적 밴드 ‘라디오헤드’도 그랬다. 그들은 공연장에서 자신들의 메가 히트곡 ‘크리프(Creep)’를 부르지 않기로 유명하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크리프’를 원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앨범이 나와도 대중은 ‘크리프’ 같은 곡이 있는가를 살폈다. ‘라디오헤드=크리프’라는 암묵적인 공식이 생길 기미가 보이자, 라디오헤드는 ‘크리프’와의 전략적인 결별을 선언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라디오헤드의 선택은 옳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타로 만들어 준 노래와 선을 그으면서 더 다양한 음악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참고로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이 부른 록 음악 중 하나는 ‘라이크 어 롤링 스톤(Like a Rolling Stone)’이다. 비난 속에서 처음 공개된 이 노래는 몇 주 후 빌보드 싱글 차트 2위까지 올랐고,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명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음악사적인 의의뿐 아니라 밥 딜런 개인에게도 이날은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얻은 것? 동료 가수 존 바에즈(모니카 바바로)가 밥 딜런에게 건넨 말에 힌트가 있다. “네가 이겼어. 자유를 쟁취했잖아!”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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