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 서 있는 기차처럼 슬픈 게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다. 시인이 기차의 멈춤에서 슬픔을 읽어낸 이유는 분명하다. 기차는 동적인 존재다. 증기기관이 석탄을 태워 피스톤을 움직이고,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수많은 바퀴들이 맞물려 철도 위를 달리며, 기차는 마침내 세상과 이어진다.
그런 기차가 멈췄다. 빗소리만 들리는 기이한 적막 속에서. 움직여야 할 존재가 움직이지 않는 모습은 이상하고 낯설다. 절연의 이미지다. 세상과의 관계가 끊긴 듯하다. 이런 모습 앞에서 더없는 슬픔을 느끼는 건 네루다만이 아닐 것이다.
올해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기차가 멈추는 것을 보았다. 화성 배터리공장 화재 참사, 시청역 역주행 사고,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의 희생자들이 그랬다. 3000여㎞ 떨어진 이국 땅에서 새출발하려던 외국인 노동자와 승진을 앞둔 평범한 직장인, 이제 막 세상을 마주한 세 살배기 아이. 모두가 불의의 사고로 멈춰섰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있던 가족들의 시간도 함께 멈췄다. 서울이든, 경기든, 전남이든, 또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초로의 노인이든 청춘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그랬다. 유족들은 그저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마치 빗속에 서 있는 기차처럼, 우두커니, 쓸쓸히.
이런 거대한 슬픔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애도했을까. 애도란 무엇인가. 애도는 상실의 고통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애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프로이트는 애도를 통해서만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애도에 성공한 사람은 상실로 인해 잃었던 생의 에너지를 점차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와 의미에 투자할 수 있다. 반면 애도의 과정이 불충분하면 산 자는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을 껴안고 자신을 공격한다.
후에 프로이트의 연구는 ‘애도의 정치학’으로 발전했다. 애도는 비단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치유 과정이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이후 독일 사회가 보여준 모습이 그랬다. 처음에는 말을 잃었고, 분노했으며, 절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슬픔은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발전했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개인의 고통은 인류 보편의 교훈으로, 죽은 자들의 기억은 미래를 향한 성찰의 출발점이 됐다.
그러니까 애도란 단순히 죽음을 붙잡고 통곡하는 행위가 아니다. 진정한 애도는 회로화된 감정의 장치를 벗어나 성찰의 과정을 동반한다. 불행히도 수많은 참사 앞에서 우리는 진영 논리에 휩싸여 잘잘못 따지기에 급급했다. 죽음의 원인은 피아식별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애도가 생략된 죽음 앞에 슬픔은 분노로 치환됐다.
무안에서 179대의 기차가 멈춰선 걸 지켜보며 새해에는 순수한 애도가 이뤄질 수 있길 바라본다. 그래야지만 산 자는 온전히 살고, 죽은 자는 온전히 죽는 사회를 마주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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