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노동자 부부의 무너진 삶
부유한 부부가 얽혀들며 균열
서로 다른 세계의 엇갈린 시선
선의·연민조차 뒤틀린 채 표출
상처받고 질투하는 인물에 집중
해고된 사람은 ‘죽은 자’, 해고되지 않은 사람은 ‘산 자’라고 부른다. 이창동(사진) 감독 신작 ‘가능한 사랑’(23일 개봉·11월 6일 넷플릭스 공개)에서 한 동네 사람들이 서로를 구분하는 방식이다.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이 영화에서 호석(설경구)은 ‘죽은 자’다. 영화는 기업의 대규모 정리해고와 총파업을 향한 폭력적 진압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그 상처가 가족과 공동체에 어떻게 번졌는지 보여준다.
호석은 한때 SP중공업 정규직 노동자였다. 사모펀드가 회사를 삼키며 구조조정이 단행됐고, 호석을 비롯해 노동자 40%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후 그는 말수가 줄고 화가 많아졌다. 술에 기대고 사람을 피한다. 아내 미옥(전도연)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던 활기찬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영화는 여러 차례 플래시백을 통해 호석과 미옥의 과거를 조금씩 드러낸다.
그런 호석과 미옥 앞에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가 나타난다. 노동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선한 의도를 앞세워 부부의 삶에 깊숙이 들어온다. 예지는 호석과 미옥을 다큐멘터리의 중심인물로 삼고 싶어 하지만, 흔쾌히 협조하는 미옥과 달리 호석은 완고하게 반대한다. 호석이 “특별하다”고 믿는 예지는 그가 마음만 연다면 훌륭한 영화가 탄생할 거라 믿는다.
예지는 부유한 가문 출신인 금융업 종사자 상우(조인성)의 아내다. 호석·미옥 부부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예지는 자신이 말하는 선의에 몰입한 나머지 취재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 필요한 거리도 기꺼이 넘는다. 미옥 부부를 식사와 여행에 초대하고, 그들의 가장 사적인 순간까지 카메라에 담으려 든다.
미옥의 내면은 또 다른 균열을 만든다. 그는 예지의 우아함과 자유를 질투한다. 돈 때문만은 아니다. 예지의 매력적인 남편 상우 역시 질투의 대상이다. 돈과 계급의식, 욕망과 질투가 미옥의 내면에서 뒤엉킨다. 영화 후반부, 미옥과 호석이 상우의 호화로운 해변 별장을 찾으면서 작품의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진다. 호의와 환대로만 보이던 것들이 어느 순간 불편함으로 다가오고, 억눌려 있던 갈등이 끓어오른다.
영화는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의 열 번째 계명을 자막으로 제시하며 시작한다. 엔드 크레디트에는 이 주제를 다룬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칼로그 10’(1989)을 언급한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 서사적 유사성은 크지 않다. ‘가능한 사랑’을 단순히 탐욕에 관한 영화라고 규정하기도 어렵다. 사랑과 노동, 예술의 타인 재현의 윤리 등, 165분의 러닝타임은 풍부한 주제로 가득 차 있다.
오늘날 한국의 고용 현실을 담아낸 구체적 풍경은 특히 인상적이다. 미옥은 정규직 노동자가 셋 뿐인 제조업 공장에 다니는데, 사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조를 결성할 용기를 낸다. 총파업 당시 호석이 겪은 파업의 전모도 뒤늦게 드러난다. 공동체의 연대가 잠시 꽃을 피우는가 했지만 공권력과 자본의 무자비한 간계에 산산이 와해되고, 서로를 지켜줄 것 같던 동지들이 하나 둘 등돌리고 배신했던 과정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계급이나 노동이라는 거대한 주제가 아니라 인물들의 얼굴이다. 한때 사랑했던 미옥과 호석은 한집에 살면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두 사람의 소원함은 거시적 사회 문제와 연결돼 있지만, 한 커플의 사랑이 닳아가는 과정은 더없이 고유하게 표현됐다. 그렇기에 ‘가능한 사랑’은 메시지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영화가 아니다. 인물이 먼저다. 인간의 실제 행동보다 창작자의 비대한 자의식을 앞세우고, 인물을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장기말처럼 쓰는, 그래서 지루해지는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고 있나.
이창동은 그 반대 방식을 택했다. 내면을 가진 입체적 인물 네 명을 먼저 만들어놓고, 그들을 서로 부딪치게 한다. 인물들이 욕망하고 질투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인간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베네치아에서 트로피를 거머쥔 이창동을 향해 전도연은 “벌써부터 그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고 했다. ‘가능한 사랑’을 보고 나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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