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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미국 건국 250주년의 진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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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형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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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나라·인종차별 반성
美 사회가 소중히 여겨온 것들
보편가치 둘러싼 정체성 싸움
그 결과가 향후 美의 모습 결정

“제철소와 광산에서, 서부의 들판과 과수원에서, 동부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왔다. 어떤 사람들은 계약을 맺고 왔고,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가 여비를 대신 내주거나 빌려준 돈으로 왔다. 슬라브인, 폴란드인, 헝가리인, 이탈리아인, 스위스인 등 유럽인들을 ‘약속의 땅’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제안들은 매력적이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동했던 판화가·미술교육가였던 베르나르다 브라이슨은 ‘3000만명의 이민자들’(1935)이라는 제목의 판화를 제작하면서 이 글을 썼다. 20세기 초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항구에 도착하기 직전 여객선에 타고 있던 이민자들의 모습을 묘사한 이 판화가 눈길을 끈 건 그림 속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미국으로 향한 이민자들의 얼굴이 결코 편안해 보이지도, 설레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땅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정박을 기다리고 있다.

홍주형 워싱턴 특파원
홍주형 워싱턴 특파원

이 그림은 워싱턴 내셔널갤러리의 미국 건국 250주년 특별전에 걸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문화기관의 진보적 색채를 대상으로 ‘문화전쟁’을 벌이면서 전시 내용이 ‘순한 맛’으로 순화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전시 내용 중엔 미국의 역사와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이 그림이었다. 오늘날 미국인을 구성한 사람들은 시대와 경로는 달랐지만 대부분 다른 곳에서 이 땅으로 건너왔다. 유럽 이민자들은 기회를 찾아왔고, 아프리카인들은 노예로 끌려왔으며, 원주민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이 땅에 살고 있었다. 그 서로 다른 경험들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건 두 가지의 대표 정책이 관세와 보수적인 이민정책이다. 관세는 대외정책이니 다른 차원의 얘기고, 이민정책은 미국이 건국 250주년을 맞은 시점에 ‘이민자들의 나라’라는 미국의 자기 이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작지 않다. 하지만 ‘출생시민권’이 미국 헌법상의 권리임을 확인한 연방대법원의 최근 판결에서 보듯 250년 동안 미국을 형성해온 가치를 바꾸려는 시도는 미국 사회 곳곳의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

건국 250주년 행사가 미국 각지에서 열리고 있다. 워싱턴이 미국 전체를 대표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미국 건국 250주년을 기념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적어도 워싱턴에선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투쟁이 미국 건국 250주년을 대표하는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이민자들의 나라’, ‘인종차별에 대한 반성’, ‘민주주의와 자유의 확대’ 등 미국 사회의 가치로 여겨져 온 것들에 대한 도전과 이에 대한 저항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역사박물관 전시가 미국의 부정적인 역사만 강조한다고 비판하며 문화기관 장악을 시도하는 것, 트럼프 행정부가 산발적인 좌파 네트워크인 ‘안티파’를 국제 테러 위협으로 규정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등 계속 이어지는 ‘정체성 싸움’과 이에 맞선 소송, 저지 움직임 등이 구체적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순한 맛’ 내셔널갤러리의 건국 250주년 기념 전시 중에서도 곳곳에 숨겨 놓은 역사의식을 확인하면서 이곳이 바로 투쟁의 현장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건국 300년과 그 이후의 미국의 모습이 결정될 것이다. 어떤 쪽도 미국이지만, 미국이 걸어온 역사를 거부하면서까지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90여 년 전 브라이슨이 새겨 넣은 이민자들의 불안한 얼굴은 오늘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다시 정의하는 나라이고, 그 과정에서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 역시 끝난 적이 없다.

나아가 미국의 정체성 싸움은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 역시 미국의 헌법과 제도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상 최대 규모의 독립기념일 불꽃놀이와 기념행사보다, 이것이야말로 미국 건국 250주년이 던지는 더욱 본질적인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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