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함께 산책하던 주말 한낮이었다. 잦은 비 때문에 축축해진 땅 위로 개 발자국이 톡톡 찍혀 나갔다. 발이 참 작기도 하지. 나는 물웅덩이를 피해 종종대며 걷는 개의 뒷다리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아이들 엉덩이가 둥글게 젖어 있었다. 배드민턴장과 놀이터는 소란스럽고 잔디밭은 고요했다. 나는 잔디밭 울타리를 따라 느긋이 걸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할머니는 털이 듬성한 흰 개를 데리고 있었는데 개의 속도를 주체 못 해 팔을 활짝 열고 거의 끌려오다시피 걷고 있었다. 팔뚝보다 조금 더 작은 몰티즈인데도 그랬다. “그건 무슨 개야?” 할머니가 불쑥 묻는 통에 나는 내 개를 괜스레 살폈다. 할머니는 다시금 개가 몇 살이냐고 물었다. “아홉 살이요.” “우리 개는 열 살이야.” 할머니가 이쪽에 흥미를 잃고 다른 쪽을 향해 줄을 당기고 있는 자신의 개를 보며 말했다. “병원을 얼마나 들락날락거리는지 말도 못 해. 개가 열 살쯤 되면 아주 약을 달고 살아, 온갖 데가 다 아파.” 할머니는 뭔가 더 말하려는 기세였지만 개가 뛰어가는 방향을 향해, 올 때처럼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잠시 서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지 싶었다. 그러니까 내 개도 한 살을 더 먹으면 많이 아플 거란 얘긴가? 자신의 개가 병원을 너무 자주 가 불만이란 소리인가? 어느 쪽이든 마뜩잖은 기분이라 나는 할머니가 가는 반대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공원이라서인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와 다시 마주쳤다. 절로 얼굴이 찌푸려 들었는데, 할머니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아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든 기어코 하고 말 작정인 듯했다. 할머니는 아까보다 확실히 힘을 주어 개 줄을 당기며 다가왔다. “어느 병원 다녀?” ”네?” ”개 말야, 어느 병원 다니냐고.” 나는 아마도 불쾌한 기색이 선명한 얼굴로 입을 닫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내 개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요 앞에 병원은 개를 잘 몰라. 거긴 수술만 잘하지 진단을 못 해서 검사를 엄청 많이 해. 그러니 비싸지, 한 번 가면 돈이 엄청 나와.” 할머니 개가 뒷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줄을 끌었다. “저기 옆에 C병원 알아? 거기 원장이 개를 잘 봐. 검사도 많이 안 하고 약도 잘 들어. 하나도 안 비싸.” 할머니가 개가 원하는 방향으로 몸을 틀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개도 늙으면 자주 아파, 많이 아파. 돈 많이 든다고 놔두지 말고 아플 때마다 꼬박꼬박 데려가, 병원 안 비싼 데도 있어.” 개와 함께 할머니가 멀찌감치 가버린 뒤에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러니까 병원 얘길 해주고 싶으셨던 거구나. 서툰 화법으로나마 늙은 개를 위해서. 나는 나만큼이나 어리둥절해 있는 개 옆으로 가 천천히 쓰다듬었다. 꽤 오래전 수술했고 최근 다시금 절뚝거리기 시작한 양쪽 뒷다리를 조심해서 어루만졌다. 알아요, 할머니, 저희 개도 그 병원에 다녀요. 뒤늦은 대답이 개의 작은 발자국처럼 바닥으로 톡톡 떨어져 박혔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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