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작은 빛도 다시 우리를 비춰줄 수 있어”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정말 잊히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으면, 아주 오래전의 작은 빛도 다시 우리를 비춰줄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배우 김혜자(85)가 15일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감독 송일곤, 21일 개봉) 시사회에서 손편지에 적어 취재진에게 건넨 말이다.
김혜자가 9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다룬다. 그러나 김혜자가 기억해달라고 당부하는 것은 두 주인공 소녀가 겪은 고통만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역사 안에서도 꿈꾸고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어 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다.
김혜자가 출연을 결심한 계기는 지난해 가을 송일곤 감독에게 받은 편지였다. 그 안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고 한다. “순옥은 울지 않습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한 시간이 여전히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믿는 사람입니다.”
김혜자는 “그 말이 참 오래 마음에 남았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기억해야 한다”면서도 “그 아이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살고 싶어 했는지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영화는 1942년 경상도 산골에 사는 두 십 대 소녀 순옥(박서경)과 정임(최주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둘도 없는 단짝인 두 소녀는 각 집안의 맏딸로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변사의 영화 공연에 빠져들고, 언젠가 서울에 가서 연기하고 싶다는 꿈도 품는다.
그러나 두 소녀 앞에 놓인 현실은 가혹하다. 일본군은 장총을 들고 마을을 활보하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은 얼굴에 ‘半(반도인)’이라는 글자가 칼로 새겨진 채 만신창이로 돌아온다.
일본군이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두 소녀는 시체를 태우는 외진 화장막에 숨어 지내게 된다. 공포에 짓눌린 일상에서도 소녀들은 한글을 익히고, 첫사랑에 눈뜬다.
영화는 소녀 시절과 할머니가 된 현재를 교차해 보여준다. 나이 든 순옥(김혜자)은 인생의 찬란한 순간을 함께한 정임(차미경)과 60년 만에 재회한다. 조성하·장현성·서영희 등 베테랑 배우들도 출연해 작품에 힘을 보탰다.
김혜자는 1961년 KBS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65년째 연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지난해 출연한 JTBC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에 대해 “이 드라마가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송 감독이 오랜 기간 설득한 끝에 출연이 성사됐다.
송 감독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김혜자 선생님의 얼굴에는 큰 우주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대사를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이나 미묘한 미소, 작은 표정을 포착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선생님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연습하셨다. 지독하게 연습하신 분이었고, 현장에 오니 이미 그 캐릭터가 돼 있었다”며 “그 여정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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