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은 힘차고 파란색은 앙증맞다?…100년 전 색깔 반전
빨간색 하이힐을 신고 다녔던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분홍빛이 도는 관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선의 정승 황희. 오늘날 여성 패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하이힐과 분홍색은 과거 남성의 권력과 군사력을 상징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의미가 뒤바뀐 패션의 흥미로운 반전 역사를 짚어봤다.
◆ 말 위에서 활 쏘려고 만들었다…페르시아 기병대의 굽 있는 신발
하이힐은 오늘날 여성 패션의 대명사로 꼽히지만, 시작은 뜻밖에도 전장에 나선 남성들의 전투화였다. 10세기 페르시아 기병대는 말 위에 일어서서 화살을 쏠 때 등자에서 발이 빠지지 않도록 높은 굽의 신발을 신었다.
중동의 전투화였던 굽 있는 신발은 페르시아 군사 사절단이 유럽 왕실을 방문하면서 17세기 초반 유럽 귀족에게도 전해졌다. 당대 페르시아 기병대는 풍부한 실전 경험과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 이들의 신발은 뛰어난 군사 기량과 승마술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하수 시설이 열악해 거리에 오물이 넘쳐나던 당시 유럽 환경도 유행에 영향을 미쳤다. 두꺼운 밑창이나 높은 굽의 신발은 오물로부터 발을 보호하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 루이 14세와 마릴린 먼로가 애용한 ‘하이힐’의 역사
하이힐의 본격적인 유행을 이끈 주인공은 루이 14세다. 그는 유럽 역사상 가장 긴 72년간 재위하며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지만, 정작 본인은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이 컸다고 전해졌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그가 즐겨 신던 빨간색 하이힐은 그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꼽힌다.
스위스 국립 박물관은 “키가 작았던 루이 14세는 하이힐을 신으며 ‘태양왕’이라는 별칭에 맞게 태양에 몇 센티미터라도 더 가까워졌다고 위안을 얻곤 했다”고 공식 블로그에서 설명했다. 이후 귀족과 귀부인들이 앞다퉈 왕의 패션을 따라하면서 하이힐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여성들은 왕족과의 연관성을 피하고 싶어 하이힐 대신 굽 낮은 플랫슈즈를 신었다. 이후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무렵 노출이 많은 차림으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핀업걸’ 포스터가 유행하며 하이힐은 여성성의 상징이 됐다.
이어 1950년대 얇고 뾰족한 디자인의 ‘스틸레토 힐’이 등장하며 하이힐은 여성 패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배우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 등 당대를 풍미한 패션 아이콘들도 이 같은 하이힐 유행을 선도했다. 특히 마릴린 먼로는 “하이힐을 누가 발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여성은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 “빨간색과 가까운 분홍색은 불과 힘을 상징”…분홍색을 입었던 남자아이들
‘여성은 분홍색, 남성은 파란색’이라는 고정관념을 떠올릴 수 있지만, 과거에는 성별에 따른 색상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1918년 미국 유아복 잡지 ‘어쇼의 유아복 코너(Earnshaw’s Infants’ Department)’에는 “더 힘찬 색깔로 여겨지는 분홍색이 남자아이에게 더 잘 어울리고 여자아이들은 앙증맞은 색깔인 파란색을 입었을 때 더 예뻐 보인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같은 해 여성지 ‘레이디스 홈 저널’ 역시 빨간색에 가까운 분홍색은 불과 힘을 상징해 남아에게 어울리고 부드러운 하늘과 햇살을 연상시키는 파란색 계열이 여아에게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1940년대 들어 의류 제조업체들이 소비자 기호를 고려해 성별에 따라 색상을 구분한 옷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여성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여성성을 강조한 스타일보다 중성적인 스타일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1980년대에는 다시 상대적으로 성별 구분이 뚜렷한 의류 시장이 형성됐다.
그 무렵 의학의 발전으로 예비부모들은 뱃속에 있는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 수 있게 됐다. 이때 유아용품 제조업체들이 ‘성별 공개 파티’를 열거나 성별에 맞춰 용품과 방을 새로 꾸미는 부모들을 타깃으로 상업적 마케팅을 펼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 조선 후기 관리들의 분홍색, ‘담홍색’
조선시대 때도 분홍색은 특정 성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한국연구재단 한국복식사전에 따르면 분홍색은 왕의 도포, 왕후의 저고리뿐만 아니라 양반가의 겉옷, 서인·천인 남녀의 속옷·겉옷에서도 다양하게 사용됐다. 조선 후기 관리들은 한때 평상시 집무를 볼 때 입던 관복인 시복(時服)을 옅은 분홍빛을 띤 담홍색으로 입었다.
실제로 조선 후기 문신인 허목(1596∼1682)과 채제공(1720∼1799), 문신 겸 서화가 강이오(1788∼1857) 등 많은 초상화에 담홍색 의관을 갖춘 모습이 남아있다. 이 밖에도 조선 후기에 다시 그려진 조선 초기의 대상 황희(1363~1452)의 모사 영정에서도 담홍포를 입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성별과 무관한 젠더리스 디자인이 시장의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면서 패션업계 속 성별 경계는 이전보다 점차 옅어지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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