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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도 못 달던 세계 1위”…사발렌카 버티게 한 ‘아버지와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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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원 기자 rewonv@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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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떠난 뒤 지킨 ‘그랜드슬램 2승’ 약속…US오픈 3연패 도전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의 빌리진킹 내셔널 테니스센터.

 

마지막 공이 코트 밖으로 벗어났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여자 테니스 세계랭킹 1위는 코트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지난해 US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어맨다 아니시모바를 꺾고 우승한 아리나 사발렌카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AP뉴시스
지난해 US오픈 여자 단식 결승에서 어맨다 아니시모바를 꺾고 우승한 아리나 사발렌카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AP뉴시스

 

2년 연속 US오픈 우승. 아리나 사발렌카(28)가 다시 정상에 섰다.

 

그런데 중계 화면 속 그의 이름 옆이 허전했다. 국기가 없었다.

 

어맨다 아니시모바(아래) 이름 옆에는 성조기가 있지만 아리나 사발렌카(위) 이름 옆은 비어 있다. TVN 스포츠 캡처
어맨다 아니시모바(아래) 이름 옆에는 성조기가 있지만 아리나 사발렌카(위) 이름 옆은 비어 있다. TVN 스포츠 캡처

 

시상식에서도, 공식 대진표에서도 사발렌카의 이름 옆에는 벨라루스 국기가 붙지 않는다. 사발렌카는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세계 1위가 된 지금도 자신의 국기를 달고 코트에 설 수 없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생긴 일이다. 러시아를 지원한 벨라루스에 대한 조치로 국제 테니스 기구들은 러시아와 벨라루스 선수들의 출전은 허용하되 국가를 대표하지 않는 개인 자격으로만 뛰게 했다. 세계 1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1위에게 따라붙은 질문

 

사발렌카를 향한 시선은 코트 밖에서도 이어졌다.

 

벨라루스 야권 인사들은 사발렌카가 조국의 전쟁 가담을 규탄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큰 영향력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사발렌카는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루카셴코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치의 한복판에 서는 것은 거부했다. 2023년 프랑스오픈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스물다섯 살 테니스 선수일 뿐이다. 정치를 하고 싶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뿌리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국적을 둘러싼 질문에 그는 담담히 답했다.

 

 “그래도 모두가 내가 벨라루스 선수라는 걸 알고 있다.”

 

코트에서 조국의 이름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이름은 따로 있다.

 

사발렌카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생일을 맞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진. 사발렌카는 “너무 그립다. 오늘 살아계셨다면 44세가 됐을 텐데”라고 적었다. 사발렌카 SNS 캡처
사발렌카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생일을 맞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진. 사발렌카는 “너무 그립다. 오늘 살아계셨다면 44세가 됐을 텐데”라고 적었다. 사발렌카 SNS 캡처

 

여섯 살 딸에게 라켓을 쥐여준 아버지

 

민스크의 어느 오후였다. 여섯 살 소녀가 아버지 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차창 밖으로 빈 테니스 코트가 스쳤다.

 

아버지가 차를 세웠다.

 

“한번 해볼래?”

 

딸의 손에 라켓을 쥐여줬다. 우연한 시작이었다. 아이가 처음 테니스를 좋아한 이유도 거창하지 않았다. 훈련을 하면 가끔 학교를 빠질 수 있어서였다.

 

아버지 세르게이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다. 열아홉에 교통사고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하지만 못다 이룬 꿈을 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딸이 작은 경기 하나를 이겨도 함께 기뻐했고,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먼저 봤다.

 

사발렌카는 그런 아버지를 닮고 싶었다.

 

“아버지처럼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부녀에게는 어느 순간 둘만의 약속도 생겼다. 스물다섯 살이 되기 전에 메이저 대회(그랜드슬램)에서 두 번 우승하는 것. 당시에는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2023년 호주오픈에서 생애 첫 그랜드슬램 우승을 차지한 뒤 SNS에 올린 사진. 사발렌카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해 “아빠, 내가 자랑스러울까요?”라고 적었다. 사발렌카 SNS 캡처
2023년 호주오픈에서 생애 첫 그랜드슬램 우승을 차지한 뒤 SNS에 올린 사진. 사발렌카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해 “아빠, 내가 자랑스러울까요?”라고 적었다. 사발렌카 SNS 캡처

아버지 없이 지킨 약속

 

2019년 11월, 아버지 세르게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마흔셋, 수막염이었다.

 

사발렌카는 스물한 살이었다. 아직 세계 10위권 밖이었고, 그랜드슬램 우승컵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코트로 갔다. 공을 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코트가 유일한 도피처였다. 하지만 연습이 끝나는 순간, 기억은 어김없이 다시 밀려왔다.

 

집은 더 힘들었다. 어머니가 자신보다 더 아파하는 게 보여 마음껏 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혼자 울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리고 다음 날이면, 다시 라켓을 들었다.

 

첫 우승까지는 3년이 더 걸렸다. 2023년 호주오픈에서 사발렌카가 마침내 생애 첫 그랜드슬램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부족했다. 아버지와의 약속은 ‘두 번’이었으니까. 1년 뒤 다시 호주오픈 결승에 올랐다. 또 이겼다. 그랜드슬램 2승. 마침내 약속을 지켰다.

 

우승 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어딘가에서 아버지가 나를 지켜보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어요.”

 

다시 뉴욕으로…3연패 향한 도전

 

2024년 US오픈에서 우승한 사발렌카는 지난해 다시 정상에 올라 여자 단식 2연패를 달성했다. 세리나 윌리엄스 이후 처음 나온 기록이었다. 통산 그랜드슬램 우승도 네 차례로 늘었다.

 

오는 30일, 사발렌카는 다시 뉴욕의 코트에 선다. 아버지와 약속했던 그랜드슬램 2승은 이미 이뤘다. 이번 목표는 US오픈 3연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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