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진주만’(2001)에는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할 때 어느 흑인 병사가 군함에 장착된 기관포를 고공으로 사격, 일본 전투기를 격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수병은 해군 취사병인 동시에 권투를 아주 잘하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할리우드 인기 배우 쿠바 구딩 주니어가 연기한 해당 병사는 실존 인물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 미 태평양함대에 속한 군함 ‘웨스트 버지니아’의 취사병으로 복무했던 도리스 밀러(1919∼1943)가 주인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첫번째 임기 도중인 2019년 제78주년 ‘진주만 추모의 날’을 앞두고 발표한 성명에서 밀러를 극찬했다. 트럼프는 진주만 피습 당일 밀러의 전공을 언급한 뒤 “놀랍게도 밀러는 함정의 기관포를 다루는 법을 훈련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공적으로 밀러에겐 해군십자훈장(Navy Cross)이 수여됐는데,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이 영예를 받은 이는 밀러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이듬해인 2020년 미 해군은 앞으로 건조할 새 핵추진 항공모함에 밀러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그 동안 항모들은 링컨, 루스벨트, 레이건, 트루먼, 아이젠하워, 부시, 포드, 케네디 등 역대 대통령을 따 명명(命名)해 온 관행에 비춰보면 매우 이례적인 조치다.
사실 밀러에겐 해군십자훈장보다 격이 높은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주어졌어야 한다는 견해가 많았다. 이는 미국에서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에 해당한다. 일각에선 1940년대 당시 해군을 비롯한 미국 사회 전역에 인종 차별이 만연했던 점을 들어 밀러가 흑인이란 이유로 불이익을 입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마바 행정부 시절 밀러에게 명예훈장을 추서(追敍)하는 방안이 검토됐으나, “전례가 없는 일”이라는 반대에 부딪혀 끝내 무산됐다.
20일 CNN 방송에 따르면 미 해군이 애초 밀러로 부르기로 했던 항모의 명칭 변경을 검토 중이다. 사실이라면 트럼프 1기 행정부의 결정이 2기 행정부에 의해 뒤집히는 셈이다. 새 이름으로 트럼프가 유력하다고 하니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다. 그러면서 흑인들의 반발을 감안해 밀러에게는 앞서 불발에 그친 명예훈장을 추서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1943년 태평양에서 일본 함정과의 교전 도중 전사한 밀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밀러의 이름을 딴 항모 건조와 명예훈장 추서가 양립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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