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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수표’ 대신 ‘증명’을 택했던 축구 레전드…그래서 박지성의 말은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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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원 기자 rewonv@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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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미드필더에서 월드컵 영웅으로
해설위원이 돼 다시 한국 축구를 묻다
“이기려고 한 경기가 맞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식 팟캐스트에 출연한 박지성. 맨유 홈페이지 캡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식 팟캐스트에 출연한 박지성. 맨유 홈페이지 캡처

 

지난 6월 25일, 멕시코 몬테레이 BBVA 스타디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0-1로 패한 한국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조별리그 최종전이 끝난 직후였다. 마이크 앞에 선 해설위원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신중함보다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공격을 어떻게 풀어가겠다는 게 없었다. 3차전까지 같은 모습만 나왔다.”

 

한국은 남은 경기 결과를 기다렸다. 사흘 뒤 콩고민주공화국이 승리하면서 경우의 수는 모두 사라졌다. 32강 진출이 좌절되자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어쩌면 우리는 몇 년 전부터 이 결과를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돌아봐야 하는 이 순간이 비참하다.”

 

“우리가 어떻게 월드컵을 준비하고, 한국 축구의 발전을 해 나가야 하는지 10년 동안 배우고도 또 까먹었다.”

 

한국 축구를 향해 이 말을 던진 이는 박지성(45)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역사를 새로 썼던 선수가, 2026년에는 해설위원이 되어 무너진 후배들을 향해 쓴소리를 냈다. 박지성의 말이 무겁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월드컵 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축구가 가장 빛났던 순간마다 그라운드 위에 있었고, 스스로를 증명해 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증명의 시작은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뒤 거스 히딩크 감독과 포옹하는 박지성. 연합뉴스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뒤 거스 히딩크 감독과 포옹하는 박지성. 연합뉴스

 

확신을 만든 골, 역사를 바꾼 골

 

2002년 5월 26일 수원월드컵경기장. 한·일 월드컵 개막을 앞둔 친선 경기에서 한국은 프랑스를 만났다. 전반 25분, 김남일의 롱패스를 받은 미드필더가 프랑스 수비수이자 주장인 마르셀 드사이를 제친 뒤 왼발 슈팅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당시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던 박지성이었다. 훗날 그는 이 골을 자신의 축구 인생 최고의 골로 꼽았다.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자신이 공격적인 역할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순간이었다.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 결승골 장면. 로이터 연합뉴스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 결승골 장면. 로이터 연합뉴스

 

진짜 무대는 6월 14일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열린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이었다. 이기면 16강, 지면 탈락할 수도 있는 경기였다. 후반 24분, 박지성은 페널티박스 안에서 날아온 공을 가슴으로 떨어뜨린 뒤 왼발 슈팅으로 골문을 갈랐다.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조별리그 1위와 16강 진출을 동시에 이뤄낸 결승골이었다.

 

골을 넣은 박지성은 동료들을 지나 곧장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안겼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연고 팀 수원 삼성조차 그를 외면했고, 대학 진학도 뜻대로 풀리지 않았던 청년이었다.

 

그 골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수원공고 재학 시절 모습. 대한축구협회 제공
수원공고 재학 시절 모습. 대한축구협회 제공

 

개구리즙과 사슴피 그리고 테니스부 정원

 

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그의 키는 162㎝에 불과했다. 왜소한 체격 때문에 축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아버지 박성종씨는 아들의 꿈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정육점을 열었다. 개구리즙, 녹용, 사슴피까지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구해 먹였다.

 

박지성은 훗날 자서전에서 “그때는 무엇을 먹는지도 몰랐다. 한 번은 약을 먹고 토한 적도 있었지만, 축구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고 회상했다.

 

수원공고 시절 그를 지도했던 이학종 감독은 “눈에 띄는 개인기나 화려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가장 많이 뛰는 선수였다”고 기억했다.

 

키는 조금씩 자랐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수원공고를 졸업한 뒤 목표했던 대학 진학은 무산됐고, 프로 구단들의 선택도 받지 못했다.

 

박지성은 “나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충격이 컸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갈 곳을 잃은 그를 받아준 곳은 명지대였다. 이미 신입생 선발이 끝난 시점이었기에, 김희태 감독은 축구부가 아닌 테니스부의 남는 정원 하나를 빌려 박지성을 입학시켰다.

 

명지대에서도 그는 가장 많이 뛰는 선수였다. 올림픽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서는 70m 이상을 단독 돌파해 수비수 5명과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었다. 그 경기 하나로 국가대표의 문이 열렸다.

 

백지수표를 거절하고 선택한 무대​

 

“원하는 액수를 적어라.”

 

2002년 여름, 월드컵 4강 신화를 막 써낸 스물한 살 박지성 앞에 백지수표가 놓였다. 한국의 한 프로 구단이 내민 제안이었다. 축구 선수가 평생 한 번 받을까 말까 한 조건이었다.

 

그의 앞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백지수표, 소속팀 교토 퍼플상가와의 재계약, 그리고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행이었다.

 

그는 백지수표를 가장 먼저 지웠다. 자서전에서 밝혔듯 그건 고민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남은 고민은 교토에 남느냐, PSV로 가느냐뿐이었다. 

 

유럽이라고 무조건 갔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PSV가 아닌 다른 유럽 팀이었다면 일본에 남았을 수도 있다”고 했다. 돈을 지우고, 간판을 지우고, 그에게 남은 기준은 하나였다. 자신을 성장시킬 무대인가.

 

“당시 나에게는 당장의 돈이 중요하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뛰는 유럽 무대에서 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2014년 PSV 에인트호번 홈구장에서 열린 박지성의 은퇴식. OMROEP BRABANT 홈페이지 캡처
2014년 PSV 에인트호번 홈구장에서 열린 박지성의 은퇴식. OMROEP BRABANT 홈페이지 캡처

 

위송 빠레, 야유가 노래가 되기까지

 

2003년 그는 교토를 떠나 PSV 유니폼을 입었다. 2002년 월드컵 활약을 눈여겨본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팀이었다. 기대를 받으며 합류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홈팬들도 저한테 야유를 많이 했다. 교체 선수로 뛰려고 서 있으면 야유를 하고, 공이 내게 오면 야유를 시작한다. 3만여 관중이 들어오는데 매번 그런 상황이 펼쳐지니 상당히 힘들었다.”

 

박지성은 자신의 연봉을 스스로 깎는 조건으로 재계약했다. 실력으로 다시 인정받겠다는 뜻이었다. 백지수표를 지웠던 손으로, 이번에는 제 몸값을 낮췄다.

 

이듬해 답이 나왔다. 2004~2005시즌 그는 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성장해 PSV를 리그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으로 이끌었다.

 

AC밀란과의 4강 2차전에서는 전반 9분 만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파올로 말디니와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버티던 수비를 뚫은, 한국인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본선 골이었다. 그를 향해 야유를 보내던 홈팬들은 이날 박지성의 응원가인 ‘위송 빠레(박지성의 네덜란드식 발음)’를 불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모습. BBC 홈페이지 캡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모습. BBC 홈페이지 캡처

 

그 골을 지켜본 이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었다. 그는 박지성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불러들였다.

 

퍼거슨 감독이 높이 평가한 것은 드리블이나 화려한 기술이 아니었다. 활동량, 헌신적인 자세, 전술을 이해하는 총명함이었다.

 

맨유 시절 박지성에게는 ‘축구화 바닥에 흰 페인트를 묻히고 뛰면 그라운드 전체가 흰색으로 변할 것’이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맨유에서 보낸 7시즌 동안 그는 프리미어리그 우승 4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를 함께했다.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식에서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함께한 모습. 연합뉴스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식에서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함께한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늘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8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그는 8강과 4강을 뛰며 팀을 결승까지 올려놓고도 정작 출전 명단에서 제외됐다. 그때도 불평하지 않았다. 2012년 박지성이 맨유를 떠날 때, 퍼거슨은 편지를 보냈다. 

 

“원하는 만큼의 출전 시간을 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팀을 위해 뛰어주어 고마웠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한국의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끈 박지성. 연합뉴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한국의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끈 박지성. 연합뉴스

 

클럽에서 그랬듯 태극마크 앞에서도 그는 계산하지 않았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는 살인적인 일정에도 대표팀 소집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팀을 이끌며 한국 축구의 원정 첫 16강 진출을 이뤄냈다. 무릎은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2011년 1월 아시안컵을 끝으로 A매치 100경기를 채운 그는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무릎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자 그라운드를 완전히 떠났다.

 

JTBC 해설위원으로 나선 박지성. 연합뉴스
JTBC 해설위원으로 나선 박지성. 연합뉴스

 

날 선 지적, 아낌없는 박수

 

그라운드를 떠난 그는 마이크를 잡았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해설위원으로 데뷔했을 당시만 해도 감정을 아끼고 이성적인 분석에 집중했다. 8년이 지난 2026년 월드컵 중계석의 박지성은 달랐다. 아쉬운 장면에는 날 선 지적을 쏟아냈다.

 

비판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준이 분명했을 뿐이다. 조별리그 첫 경기인 체코전 역전승 직후 박지성은 “선수들이 정말 좋은 경기를 보여줬다”며 “리드를 내줬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역전승을 해냈다”고 박수를 보냈다.

 

“칭찬하지 않을 선수가 없다. 모든 선수들에게 칭찬해 주고 싶은 날”이라고도 했다. 황인범의 동점골을 두고는 “2006년 프랑스전 당시 내 동점골보다 낫다”고까지 말했다. 자신의 커리어를 내려놓고 후배를 올려 세운 칭찬이었다.

 

이번 월드컵 중계를 함께한 윤샛별 JTBC PD는 박지성을 “누구보다 축구에 진심인 분”이라고 했다. “박 위원은 중계가 없는 날이면 늘 대표팀 훈련장을 찾았다”며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2026 북중미 월드컵 기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베이스캠프를 찾은 모습. 뉴스1
2026 북중미 월드컵 기간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베이스캠프를 찾은 모습. 뉴스1

 

24년 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청년은 한국 축구를 세계의 중심부로 밀어 올렸다. 백지수표보다 중요했던 도전, 연봉을 깎아가며 증명하려 했던 치열함, 팀을 위해 자신을 지웠던 태도. 지금의 한국 축구가 잃어버린 것들이다.

 

그리고 2026년 오늘, 그는 마이크를 들고 다시 한번 묻고 있다.

 

한국 축구는 무엇을 위해 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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