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급·모가미급까지 대안으로 거론
법·보안·일자리 장벽 넘어야 현실화
미국이 해외에서 군함의 주요 부분을 조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 국방부가 2027회계연도 예산에 동맹국 조선소의 함정 건조 능력 연구비로 18억5000만달러(약 2조8000억원)를 반영한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미 해군연구소(USNI) 뉴스는 “해군 함정에 외국 설계 도입을 검토하는 것이며, 일부 작업은 해외 조선소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해외 조선소는 한국과 일본을 뜻한다. 기존 호위함 설계 채택부터 해외 제작 모듈을 미군 함정에 통합하는 것까지 다양한 옵션을 검토할 전망이다.
군함 최대 2척의 선체·기계·전기 구조물을 한국이나 일본에서 만들고, 미국 방산업체가 전투체계 통합을 주도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초기 물량을 해외에 의존하되 중장기적으론 해외 업체의 대미 투자를 통해 미국 내 생산을 진행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실현된다면 미국 조선 시장에 진출하는 효과가 있으나, 이 구상이 실현되기까지의 길은 매우 복잡하다는 평가다.
◆중국에 뒤진 美 함정 건조
미 의회조사국(CRS)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미 해군 전투함은 293척이다. 반면 중국 해군은 370척이 넘으며, 2030년까지 435척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같은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랜드(RAND) 연구소에 따르면, 중국의 함정 건조 속도는 미국보다 5배 빠르다.
미 해군의 함정 건조 예산은 꾸준히 증가해왔지만, 숙련공 부족, 공급망 불안정, 조선소의 노후화된 기반 시설 등으로 건조가 지체되는 사례가 잇따랐다.
미국·영국이 호주에 핵추진잠수함을 제공하는 오커스(AUKUS)도 이같은 문제로 영향을 받고 있다.
호주는 미국에서 버지니아급 공격핵추진잠수함 3척을 도입하면서 미군이 운용 중인 함정 2척과 신규 건조 함정 1척을 인수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군이 쓰던 함정 3척을 받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신규 함정 건조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미국 조선소의 버지니아급 잠수함 건조량은 연간 1.1∼1.2척으로 목표인 2.33척에 크게 미달한다.
핵추진항공모함도 마찬가지다. 과거 니미츠급 핵항모 건조 기간이 평균 7~9년이었다면, 제럴드 포드급 핵항모는 15년 이상이 소요된다. 숙련된 노동력과 공급망 부족이 원인이다.
이는 급속도로 확장되는 중국 해군에 맞서 해군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미 해군은 대서양과 지중해 등에 전력을 투입해야 하므로, 태평양에 전개할 수 있는 전력이 제한적이다. 반면 중국은 모든 해군력을 태평양에 집중시킬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중국 못지 않게 빠른 속도로 함정을 확보해야 하는데, 건조 속도는 더욱 벌어지는 모양새다. 이같은 국면을 근본적으로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거론되는 함정은
현재 미 해군은 비용·일정 문제로 취소한 컨스털레이션 호위함을 대체할 차세대 호위함 사업을 추진중이다.
FF(X)로 불리는 미국의 차세대 호위함은 조속한 전력화에 초점을 맞췄다.
미 해안경비대 레전드급 경비함을 토대로 57㎜ 함포, 30㎜ 기관포, 함대공미사일(RAM), 함미 컨테이너형 무장 공간 정도만 갖춘다. 수직발사체계(VLS)와 대잠수함전 장비는 찾아보기 힘들다. 마약 단속 수준의 저강도 작전만 가능하다.
전투함 숫자를 빠르게 늘리려는 조치지만, 냉전 시절 호위함에도 있었던 대잠수함전 장비가 없는 것을 두고 중국 해군과의 대결에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향후에는 VLS와 대잠수함전 장비를 추가할 예정이지만, 줌왈트·컨스털레이션 등 미 해군의 주요 함정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의 호위함 설계가 차후에 활용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는 평가다.
현재 거론되는 함정은 일본의 모가미급과 한국의 대구급 호위함이다.
모가미급은 5500t급 함정으로 스텔스 선체를 갖추고 있다.
높은 수준의 자동화 체계를 통해 90명의 승무원으로도 운용할 수 있다. MK41 수직발사체계(VLS)을 탑재해 ESSM 함대공미사일 등을 사용할 수 있다. 호주가 도입을 결정했고, 뉴질랜드와도 논의가 진행중이다.
대구급은 3600t급 호위함이다.
가스 터빈과 전기 추진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추진 시스템을 사용해 수중으로 방출되는 소음을 줄이고 대잠수함전 성능을 높였다. MK41 VLS와 첨단 소나 시스템 등을 갖췄다. 연안에서의 작전에 적합하다는 평가다.
모가미급과 대구급은 이미 일본과 한국에서 생산되어 전력화된 함정이다. 미국 조선소보다 건조 기간이 짧고, 비용도 저렴하다. 미국산 무장체계도 일부 갖추고 있다.
일각에선 우려도 나온다. 한국, 일본, 미국의 군함 관련 요구성능은 제각각이다. 미 해군의 요구사항을 충족하려면 설계를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
과거의 프로젝트에서 발생했던 것과 유사한 지연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미 해군은 이탈리아 카를로 베르가미니급(FREMM) 호위함을 토대로 VLS와 이지스 전투체계 등을 갖춘 컨스털레이션급 호위함 건조를 추진했으나, 잦은 설계 변경과 비용·일정 초과로 건조 물량이 2척으로 대폭 축소됐다.
◆각종 제약 존재…단계적 접근 필요
협력을 향한 발걸음 앞에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있다. 가장 단단한 벽은 미국 내 법과 제도다.
반스-톨레프슨법은 미 해군 함정의 선체나 상부 구조물 등의 외국 내 건조를 금지한다.
미 국무부가 관리하는 국제무기거래규정(ITAR)도 있다.
국방 관련 품목·기술 수출입을 통제하는 미국 연방 규정으로서,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규제 대상 제품이나 기술을 다루는 외국 기업 및 파트너도 규제를 받는다. 관련 기술 데이터를 외국인과 공유할 때도 엄격한 통제가 적용된다.
보안 문제도 있다. 군함의 핵심은 첨단 소프트웨어가 쓰이는 전투체계와 전자장비다. 기밀 등급이 높은 것들이다. 미 해군이 민감한 군사 정보 노출 가능성을 우려한다면, 협력을 고도화하기는 어렵다.
미국 내 조선소 일감 감소에 따른 일자리 축소를 우려하는 미 의회의 부정적 기조도 걸림돌이다.
정부가 지난해 미국 측에 한국 조선업계가 미 해군 전력의 유지·발전에 기여하는 방안으로 ‘한국 내 블록 생산-미국 현지 최종 조립’을 제시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해군 함정은 수십 개의 블록을 지상에서 생산 후 조선소 내 거치대에서 조립하는 절차를 거친다. 법적 규제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서 만든 블록을 미국 내 조선소로 가져가 조립하자는 것이다.
일각에선 점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내 제도 개정과 정치권 기조 변화를 촉구하면서 현행 제도 내에서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을 적극 발굴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 함정 유지·보수·정비(MRO)는 법적 장벽이 없고 실적도 쌓이고 있어서 향후 확대가 쉽다.
한화오션은 한국 기업 최초로 미 해군 군수지원함 월리 쉬라함 MRO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당시 도면이 없는 핵심 부품(방향타) 파손을 복원해 미 해군의 극찬을 받았다. 이후 속적으로 MRO 계약을 수주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도 미국의 함정정비자격인증(MSRA)을 획득, 보급함 정비계약을 잇따라 수주했다. HJ중공업과 SK에코플랜트도 뛰어들고 있다.
미 함정 MRO는 국내 조선소에 미 해군의 함정 건조·유지보수 관련 요구도와 보안 수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다.
작업을 감독하는 미 해군 관계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미 해군도 한국 조선업계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협력 확대를 위한 인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도움이 된다.
미 해군 지원함정 설계나 건조 등에 참여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전투체계나 무장 등 높은 수준의 보안이 적용되는 전투함보다는 보조함이나 군수지원함 등이 접근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할 수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0월 미국 헌팅턴 잉걸스 조선소와 합의각서(MOA)를 맺었다.
양사는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 설계·건조에 협력하고, 상선과 군함 분야 전반에 건조 비용과 납기 개선을 위한 노하우와 역량을 공유하기로 했다.
해당 MOA의 성패 여부에 따라 미 해군 지원함정 설계·제작 분야 진출도 판가름날 전망이다.
미 해군이 해외 조선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다. 미국 조선산업의 쇠퇴, 중국과의 해군력 격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국 조선업계로선 지위 격상과 수익 확대의 기회지만, 미국의 정치적 환경이라는 리스크도 있다.
업계와 정부 차원에서 미국의 제도 개선을 촉구하면서 미 해군 군함 시장 접근을 확대하는 중장기적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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