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의 ‘쌍두마차’였던, 이제는 같은 해를 지고 살 수 없는 사이가 된 두 숙적 간의 직접적인 맞대결은 밀라노에서 성사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는 영원히 성사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중국 쇼트트랙 남자 대표팀의 린샤오쥔(30·한국명 임효준)은 지난 19일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m 준준결승 3조에 출전해 40초638로 4위에 그치며 준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이로써 린샤오쥔은 이번 올림픽 개인전에서 단 한 번도 준결승 무대조차 밟지 못하고 개인전을 끝마쳤다. 남자 1000m 준준결승에서는 5조에 출전해 최하위인 5위에 그치며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1500m 준준결승에선 혼자 넘어져 완주조차 하지 못했다.
중국 귀화 후 500m에서 강세를 보였던 린샤오쥔이었기에 이날은 메달을 따내며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았지만, 준준결승에서조차 이렇다 할 추월시도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조 4위에 그치고 말았다. 금메달은커녕 준결승 무대조차 오르지 못한 초라한 무관이 된 린샤오쥔이다.
린샤오쥔이 아닌 임효준이었던 시절, 2018 평창에서 남자 1500m 금메달과 500m 동메달을 따냈던 그다. 2019 세계선수권에서도 1000m, 1500m, 3000m 슈퍼 파이널 금메달로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누렸던 것을 감안하면 린샤오쥔은 이번 밀라노에서는 7년이라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셈이다.
이렇게 린샤오쥔이 어쩌면 생애 마지막 올림픽을 너무나 초라하게 마친 건 2019년 6월의 ‘비극적인 하루’가 발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때문에 임효준은 어쩔 수 없이 귀화를 ‘당해’ 린샤오쥔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임효준이었던 시절인 2019년 6월17일. 임효준은 진천선수촌에서 쇼트트랙 남녀 대표팀 동료들과 공식 훈련 전, 암벽 등반 기구에서 장난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암벽 기구에 오르던 황대헌의 반바지를 임효준이 잡아당기는 장난을 쳤다. 그 순간 황대헌의 엉덩이 일부가 노출됐다.
처음엔 가벼운 장난으로 치부됐던 이 사건은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황대헌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며 성희롱으로 신고했기 때문. 당시 임효준은 “친근함의 표시였을 뿐 성추행의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황대헌의 입장은 단호했다. 임효준의 수차례 사과 시도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동성 간 성추행’이라는 낙인이 찍힌 임효준은 선수자격 정지 1년 처분을 받아야 했다. 2019∼2020시즌은 물론 2020∼2021시즌 대표 선발전에도 출전할 수 없게 됐다. 사실상 두 시즌을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면서 선수생명 자체에 위기를 맞았다.
이후 2년간 법정 다툼 다툼이 계속됐다. 1심에선 임효준의 강제추행 혐의를 인정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지만, 2심과 대법원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한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법적으로는 억울함을 푼 임효준이지만 2년간의 법적 다툼 속에 선수 생명에 위기를 느꼈고, 결국 2020년 6월 중국으로 귀화를 선택했다. 그의 이름은 임효준이 아닌 ‘린샤오쥔’이 됐다. 귀화 자체를 선택한 건 린샤오쥔의 의지였지만, 그를 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 건 황대헌과 대한빙상경기연맹이었다.
올림픽 출전을 위해 국적도 포기한 린샤오쥔이지만, 정작 2022 베이징 올림픽에는 설 수 없었다. 국적을 바꿀 경우 올림픽 출전을 위해선 이전 국적으로 마지막 국제대회 출전 이후 3년이 지나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2019년 3월 태극마크를 세계선수권 종합우승을 차지했던 린샤오쥔이었기에 중국 오성홍기를 달고 뛸 수 있는 건 2022년 3월부터였다. 2022 베이징 올림픽은 2022년 2월에 열렸다. 린샤오쥔이 그토록 뛰고 그토록 뛰고 싶었던 베이징 무대에서 자신을 중국 귀화로 내몬 황대헌은 중국의 역대 최악의 편파판정을 딛고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두 선수의 엇갈린 운명이 극명하게 대비된 장면이었다.
귀화 당시만 해도 쇼트트랙 라이벌 국가인 중국으로 귀화한 린샤오쥔을 두고 ‘매국노’, ‘징계 회피를 위한 꼼수’ 등으로 한국 여론이 싸늘하게 식었지만, 사건 당시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동정여론도 생겼다. 임효준이 장난을 치기 전에 황대헌도 암벽 기구에 오르던 여자 선수들의 엉덩이를 주먹으로 때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이 또한 엄연히 성추행에 해당되는 행동이다. 황대헌 본인도 상대가 느끼기에 따라 성추행에 해당되는 행동을 해놓고 남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식 대응이었다.
이후 황대헌은 빙판 위에서도 대표팀 선배인 박지원을 상대로 ‘팀킬 논란’을 일으키며 국내 팬들에게 비호감 이미지가 낙인찍혀버렸다. 2023∼2024 1차 월드컵을 시작으로 2024 세계선수권 1500m와 1000m까지 경기 도중 선두에 있던 박지원을 인코스로 무리하게 추월하려다 같이 넘어지거나 박지원이 추월하자 손으로 밀어버리는 등 갖가지 반칙 플레이를 저질렀다. 이후 황대헌은 “서로 경쟁하고 있었고 시합을 하다 보면 충분히 나오는 상황”이라고 해명을 했고, 그를 향한 대중의 시선은 더욱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세월이 돌고 돌아 린샤오쥔과 황대헌에게 이번 밀라노에서 정면으로 맞대결을 펼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됐지만, 두 선수가 같은 빙판에서 기량을 겨룰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린샤오쥔이 에이징 커브를 이겨내지 못한 반면 황대헌은 남자 1500m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판정승을 거두는 모양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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