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문은 국가 질서의 기초 단위였고, 공자는 가정을 정치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기독교는 '성스러운 가정'을 이상으로 내세웠으며, 근대 국민국가는 핵가족을 시민 양성의 기본 틀로 규정했다. 반면 20세기 공산주의는 가정을 '계급투쟁의 잔재'로 간주했고, 1960년대 히피 공동체는 가정을 '억압의 제도'라며 해체하려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54년에 출범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가정을 바라보는 또 다른 접근을 제시했다. 가정연합은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이 뿌리내리고, 인격이 완성되며, 평화가 시작되는 근본 터전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세계 평화를 실험하는 공적 장으로 확장시켰다. 그래서 가정연합은 가정 윤리와 결혼 문화의 회복을 평화의 근본 해법으로 제시해 왔던 것이다. 가정을 개인의 사적 영역이 아닌 인류가 재구성해야 할 미래형 공동체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기존 종교 운동과는 다른 방향성을 보였다는 평가다. 문명사적으로 이례적이고 새로운 시도였다.
국제결혼 43만 쌍, 전례 없는 규모
2025년 11월 기준, 가정연합의 국제결혼은 수십 년에 걸친 누적을 통해 43만 4천여 쌍을 넘어섰다. 참가국은 194개국에 달하며, 민족·인종·종교 배경은 실로 다양하다. 한국인-일본인 부부만해도 4만 2천 쌍, 한국인-필리핀인 1만 8천 쌍, 일본인-아프리카계 8천 쌍이 뒤를 잇는다. 여기에 유대인과 무슬림 배경을 지닌 127쌍까지 더해지면서, 이러한 사례들이 축적된 결과가 오늘의 43만 쌍이라는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가정연합은 약 3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40만 쌍이 넘는 국제결혼을 성사시키며, 종교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를 만들어냈다. 이는 종교가 결혼이라는 가장 내밀한 사회 제도를 매개로 국경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형성한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시도라 할 수 있다. 19세기 미국에서 예수그리스도교회(일명 몰몬교)가 독특한 혼인 관행을 바탕으로 30년간 약 5천 쌍을 형성한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와 파급력의 차이는 극명하다.
초국가적 혈연 네트워크의 실험
가정연합은 국제결혼을 21세기 최초의 초국가적 혈연 네트워크로 규정하고, 이를 국가·민족·종교를 초월해 인류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임을 자각하려는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시도로 설명한다. 사회 네트워크 과학(network science) 연구의 권위자 미국 예일대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인간이 서로 연결된 관계망 속에서 건강·행복·사회적 행동을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런 맥락에서 가정연합의 국제결혼은 혈연을 매개로 한 글로벌 네트워크 실험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연합 이전에 페르시아(현 이란)에서 출현한 바하이교가 ‘초국가적 결혼 이상’을 추구했지만, 실제 결혼으로 이어진 규모와 지속성은 가정연합이 훨씬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문화적 동화에서 다문화적 창조로
신흥종교와 통일교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영국 런던정경대 아일린 바커 교수는 가정연합의 초기 축복결혼은 한국 중심의 문화 수출 성격이 강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1990년대 축복가정의 70% 이상이 한국인-외국인 커플이었고, 외국인 배우자들은 한국어와 문화를 필히 학습해야 했다. 그러나 최근 변화는 뚜렷하다. 2020~2025년 신규 축복가정 중 한국인-외국인 커플 비율은 낮아졌고, 아프리카·남미 지역 주도 축복식과 자녀세대가 주도하는 지역 맞춤형 축복도 늘고 있다. 이 변화는 기존의 일방향적 문화 동화(Assimilation) 모델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적 주체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정체성과 문화적 의미를 공동 창조(Co-creation)하는 다문화적 창조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계평화 실험의 성적표
가정연합은 가정의 평화가 세계 평화로 확장된다는 논리를 70년간 실험해 왔다. 아직 성적표는 미완이지만, 몇 가지 지표는 눈길을 끈다. 상당수 탈북민의 국내 정착을 장기간 지원해 왔고, 중동 분쟁의 핵심축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축복가정이 탄생했다.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는 다문화 학교를 설립했으며, 해당 학교 졸업생 상당수가 축복결혼에 참여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 최대 도전은 글로벌 정체성(a new global identity)을 만드는 것"이라며, 종교나 이념이 아닌 "공동의 이야기와 감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가정연합은 그 '공동의 감정'을 혈연과 결혼이라는 가장 근본적 방식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남겨진 과제
가정연합 70년의 실험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민족·종교를 넘어선 ‘하나의 가족’ 모델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지속 가능한 평화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아직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인류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가장 사적인 제도를 세계 평화라는 공적 과제와 연결해 장기적이고 대규모로 실험해 온 사례는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가정연합이 만들어온 하나의 가족 모델은 현대 문명사 연구에서 중요한 기록으로 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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