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우에와 펜테우스가 마주 보는 순간 전율이 생겨난다.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에게 미혹된 테베의 왕과 그의 어머니다. “날 알아보지 못하십니까”라는 펜테우스의 간절한 목소리를 창을 든 아가우에는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오만한 인간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디오니소스가 파놓은 덫에 걸린 인간들이다.
이렇게 막 오른 지 두 시간을 훌쩍 넘긴 뒤 비로소 급물살을 타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수는 태풍처럼 거센 긴장과 압력을 끝까지 유지한다. 피가 철철 넘치고 찢긴 사지가 뒹구는 무대는 관객을 압도한다.

국립극단이 신작 ‘안트로폴리스Ⅰ’ 공연으로 내년까지 이어지는 신화의 도시 테베를 배경으로 한 그리스 비극 5부작 항행을 시작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2023년 2주 간격으로 다섯 편이 순차 공개되며 관객 갈채와 평단 찬사를 동시에 받은 화제작이다. 독일 극작가 롤란트 시멜페니히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고전 비극을 바탕으로 고대 도시 테베의 건국부터 이어지는 신화들을 무대극으로 엮었다. 작가는 한국 관객에게 보낸 글을 통해 “고대 신화는 단지 사라진 세계의 머나먼 이야기가 아닌, 그 이상”이라며 “고대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다. 갈망, 두려움, 정의를 위한 투쟁, 그리고 사회와 개인 사이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모순 속 우리의 모습이 여전히 거기 있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유럽에서 현재 최고로 손꼽히는 이 극작가는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등을 새로운 언어로 각색하고, 갓난 오이디푸스를 버린 아버지 ‘라이오스’, 전쟁을 막으려 애쓰는 ‘이오카스테’처럼 제목만 남고 내용이 소실된 영역을 독자적으로 복원했다.
테베 시리즈의 서막 격인 ‘안트로폴리스Ⅰ’ 연출은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출신 윤한솔이 맡았다. 연극 ‘두뇌수술’ 등에서 명민한 감각을 보여온 윤한솔은 1부에서 황소로 변한 제우스에게 납치된 에우로파 이야기로 시작해서 테베의 건국 신화와 문명의 기원을 서사시처럼 펼쳐낸다. 주된 초점은 디오니소스가 왜 테베 시민에게 신성을 의심받았는지다.

“이것은 연극”이라고 선언하듯 분장실 화장대가 길게 늘어선 무대 중앙에는 라이브캠 영상 투사용 스크린이 걸려 있고, 스태프들이 오가는 가운데 코러스 배우들이 대사를 읊조린다. “바다. 바다 위에 태양. 바위. 해변. 해안 뒤에 평원. 더운 날씨입니다.”
모든 대사가 마치 넷플릭스 자막처럼 스크린에 함께 뜬다. 이해에는 도움이 되지만 시선을 분산시키는 방해 요인이기도 하다. 또한 코러스가 열한명이나 되는 대규모 구성인데 마이크를 거친 배우들 음성이 스피커로 전달되면서 발화자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잦다. 음성 출력을 좌우라도 분리했더라면 좀 더 명료했을 것이다. 배우들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연기하고 관객은 이를 스크린으로 지켜봐야 하는 장면이 꽤 있는데 시차가 발생, 입 모양과 대사가 계속 어긋난다. 2부의 12·3비상계엄사태를 연상시키는 계엄령 선포 장면이나 후반부 처참한 도륙 장면을 부감으로 잡아내는 것은 인상적이다.
느슨하게 전개되는 1부는 아가우에로 맹활약하는 배우 김시영 열변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김시영은 ‘신’을 부정하며 테베 운명을 예고한다. “우리가 지금 그 모든 걸 믿고 그 환상 앞에 몸을 굽혀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 도시에 그럴 자리는 없습니다... 인간은 질서의 빛나는 형상이며 우리 모두는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습니다. 야수는 죽고 인간은 살아남습니다. 새로운 신 같은 건 없습니다.”

이처럼 오만한 테베 시민과 그 지도자를 디오니소스가 신으로서 처벌하는 과정을 담은 2부는 록 뮤지컬을 방불케 한다. 무대 안쪽에 자리한 5인 밴드의 연주에 맞춰 디오니소스의 여사제들 ‘바카이’가 춤과 노래로 서사를 이끌어 간다. 레게머리를 한 디오니소스는 경쾌한 몸짓으로 광기를 전파하고, 중세 유럽 왕족 복장의 펜테우스는 광기에 취한 시민을 단속하는 계엄령을 스크린에서 발표한다.
원로다운 관록으로 일찌감치 디오니소스에 귀의한 테베 건국왕 카드모스와 테이레시아스는 도식적인 여장으로 디오니소스의 광기를 드러낸다.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윤한솔은 기자간담회에서 “라이브 카메라를 활용한 영상의 경우 관객이 상황에 몰입하는 게 아니라 떨어져서 생각하도록 거칠게 사용했다”며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작품 전반에 철 지난 웃음 코드를 배치하는 등 B급 코드를 가미했다”고 설명했다.
춤과 노래로 역동적으로 전개되는 2막의 에너지는 아가우에가 펜테우스를 처단하는 장면부터 폭발한다. 아가우에는 그 목을 창에 꽂아 개선 행진을 벌이다 부친 카드모스 질타를 듣고서야 진실을 깨닫는다. 참혹한 현실의 파편을 그러모으는 아가우에를 보는 대목에선 절로 숨죽이게 된다. 디오니소스가 설계한 ‘전환’과 아가우에의 ‘인식’을 통해 관객은 공포와 연민을 느끼는 ‘정화’를 경험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고대 비극의 구조가 현대 무대 위에서 생생히 되살아난 순간이다.

“너무도 가혹하다”는 인간들 항변에 디오니소스는 “신인 나를 조롱했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이라며 낭랑히 카드모스 일가의 테베 추방을 선언한다. 극 초반 어리숙한 인간적 모습은 사라지고, 냉혹한 신의 권능을 품고 인간을 내려다보는 디오니소스 모습이 오연하다. 국립극단 시즌단원 모두가 흠없는 열연을 보여준 가운데 아가우에 역 김시영과 펜테우스 역 고용선의 연기가 돋보인다. 디오니소스로서 입체적 연기를 보여준 조의진이 객석에 준 인상도 강렬하다.
에우리피데스의 원작은 디오니소스가 “이것이 나를 부정한 자들의 운명”이라 선언하며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이번 작품은 아가우에가 문을 닫는다. 신을 존중하지 않아 참혹한 벌을 받았음에도 인간의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디오니소스는 모든 것을 파괴한 잔인한 신”이라 비판하며, 신이 없는 땅으로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항상 늘 용서와 구원들을 전제하고 사건을 재연하거나 무대 위에 올리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좀 들어서 과연 진짜 비극이란 무엇일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작업했던 것 같습니다. 용서나 구원이 전제된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진정한 비극이 지금 시대엔 필요한 것 같아요.”(윤한솔)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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