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그대로 얘기할 거예요.” “그걸 또 금방 (유족에게) 얘기한 겁니까.”
지난해 1월22일 서울 마포구의 한 공사현장에서 미장 작업 중 추락해 숨진 고 문유식씨 유족은 사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실랑이가 담긴 문씨 동료와 현장소장 A씨 간 통화녹음을 확인했다. 문씨 동료가 회사 부탁을 받아 안전모 수령·안전교육 이수 서류에 서명을 했단 걸 유족에게 말했다고 전하자 A씨가 당혹스럽다고 반응한 대화였다. 이후 수사로 확인된 사실은 회사가 문씨에게 안전모 지급도, 안전교육 진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문씨 동료와 A씨 간 통화 시점은 지난해 1월27일이다.
사고 후 엿새 사이, 사측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직원을 회유하고 허위 서류를 만드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산재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 이런 일이 자주 잇따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산업안전보건법·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 혐의를 받는 사측은 ‘피의자의 방어권 행사’란 명분 아래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동’에 나선다. 때때로 그건 문씨 사례처럼 ‘조작’으로까지 나아간다.
산재 사망 사고를 둘러싼 형사절차는 수사당국과 피의자 중심으로 철저히 돌아간다. 유족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문씨 딸 혜연씨는 사측이 직원들을 구슬려 서류를 꾸몄다는 얘길 듣고 ‘회사가 주장하는 대로 사건이 흘러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우린 수사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며 “수사를 받는 회사는 진행 상황에 대해 아는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우린 어떤 정보에도 다가가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당국은 피의사실 공표 문제를 들어 산재 유족의 물음을 차단한다. 딸 혜연씨는 “경찰은 ‘수사 중인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기 곤란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은 그나마 사정하니 ‘예·아니요’ 식으로 일부 질문에만 답해줬다”고 했다. 그가 사측의 안전모 미지급 사실을 확인한 건 수사 종료 후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면서 열람한 공소장을 통해서였다. 사고 발생 후 1년 가까이 지난 때다.
산재 유족의 알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이런 사정 때문이다. 다만 당국은 아직까지 피의사실 공표 문제를 들어 여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모양새다. 실제 알권리 보장과 피의자의 기본권 침해 간 충돌은 형사절차를 둘러싼, 해묵은 문제이기도 하다.
제안하고 싶은 건 이런 거다. 단순히 산재 유족의 알권리 보장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산재 수사에서 유족이 겪는 ‘소외’를 해소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힌트가 될 만한 건 우리나라 형사절차 일부에서 구현 중인 ‘회복적 사법’ 패러다임이다. 제재·처벌에 초점을 두는 ‘응보적 사법’ 기반 형사절차가 피해자를 소외시킨다는 문제의식 아래, 회복적 사법은 피해 회복과 당사자 간 타협에 초점을 맞춰 형사절차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복적 사법의 테두리 안에서 산재 유족의 소외 문제를 해소하는 절차를 마련한다면 알권리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산업재해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상위권인 우리나라가 꼭 논의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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