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우파 재건 역사에서 교훈 얻길
보수 가치 정립·외연 확대 못하면
‘진보 집권 20년론’ 현실화할 수도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그 흐름은 반복된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사태는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에는 부녀 대통령의 참담한 종말이라는 비극적 서사가, 윤 전 대통령 파면에는 어이없는 비상계엄으로 몰락한 블랙코미디 측면이 있다.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두 보수 대통령의 추락에서 국민은 가건물 같은 한국 보수의 민낯을 보게 됐다. 전 국민의힘 대표조차 “우린 폐족(廢族·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할 수 없게 된 족속)”이라고 말할 정도로 보수는 존폐의 갈림길에 섰다. 범보수 대선주자 지지율 총합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경선 후보 지지율에도 못 미친다. 국민의힘 홍준표 경선 후보의 경솔한 언급대로 “하루의 치유면 충분”한 상황이 아니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보수 진영에선 ‘반(反)이재명 빅텐트’를 펼치자는 말이 나온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선출되면 대통령 권한대행인 한덕수 국무총리 등과의 단일화를 추진해 이 후보에 맞서자는 것이다. 주요 대선 때마다 외부 인사에 기대는 행태는 한국 보수만의 유별난 특징이다. 총리 출신인 이회창·정운찬·김황식과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이 보수의 구애를 받았다. 그러나 외부 인사의 파괴력은 대체로 신통치 않았고, 이들 중 유일한 성공 사례인 윤 전 대통령마저 집권당과 불화하다가 보수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보수는 언제까지 자생력을 잃은 ‘기생(寄生) 정치’를 지속할 것인가. 보수 재건의 첫걸음은 보수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미국 보수(공화당)의 재건 과정을 참고할 만하다.
1964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은 뼛속까지 우파인 배리 골드워터를 후보로 내세웠다가 민주당에 선거인단 기준 486 대 52의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공화당은 4년 뒤 집권에 성공했지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돼 하야하면서 ‘폐족’이 됐다. 닉슨 하야 사태를 대하는 미국 보수의 자세는 달랐다. 닉슨을 ‘보수주의로 집권했지만, 진보주의로 통치한 이단아’로 규정하고 정체성 재정립의 계기로 삼았다. 사회적 보수파와 종교적 우파,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은 지엽적인 차이를 접고 손을 잡았다. 헤리티지 재단 등 우파 싱크탱크들은 논리와 정책을 공급했고 지지자들은 풀뿌리 방식으로 보수의 저변을 넓혀갔다. 그 결과가 로널드 레이건을 앞세운 보수의 1980년 대선 압승(선거인단 수 기준 489 대 49)이다. ‘하루의 치유’ 운운하며 정신 승리하지 않고, 골드워터 참패 이후 16년, 닉슨 하야 이후 6년 동안 와신상담한 끝의 결실이었다.
한국 진보 세력도 ‘폐족’을 자처한 시절이 있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의 대선 참패 후 인터넷에 반성문을 올렸다. “친노(친노무현)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입니다.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진보 진영은 2008년 총선부터 인적 청산과 세대교체를 키워드로 한 대대적인 쇄신에 나섰다. ‘무상급식’과 같은 진보 의제를 발굴하고 실험했다. 당원 배가 운동으로 민주당은 “중국 공산당, 북한 조선노동당을 제외하고 가장 당원이 많은 정당”(이재명 후보)이 됐다.
2020년 제21대 총선 직전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의 중진 의원이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자유한국당을 ‘좀비 정당’이라 비판했다. 영혼이 없는 보수라는 얘기다. 지금 국민의힘 의원들의 인적 구성이나 선거 공약 등을 보면 ‘좀비’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보수는 법치와 공익을 앞세우고, 병역 같은 공화국 시민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하자가 있는 인사나 정책은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중도층과 호남 껴안기를 중단 없이 해나가야 한다. 이런 기본을 꾸준히 다지다 보면 보수 가치에 공감하는 국민이 다수가 될 것이다. 적당히 위기를 넘기고 기득권 싸움이나 벌인다면, 한때 나돌던 ‘진보 20년 집권론’은 말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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