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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의 제5영역] 결핍의 굴레 벗는 길, 여유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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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4-16 23:38:07 수정 : 2025-04-16 23: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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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 극복에 매몰 땐 다른 가치 못 보게 돼
다음 세대 위해 급해도 ‘수술실’ 비워둬야

1950년, 36명의 건강한 실험 참가자가 단식을 시작했다. 오래 굶은 사람들을 위한 영양 보충법에 대한 실험이었다. 반세기 후 이 실험 보고서가 행동경제학자 센딜 멀레이너선과 엘다 샤퍼의 손에 들어갔다. 저자들은 실험 결과보다 보고서의 각주에 등장한 참가자들의 뒷얘기에 주목했다. 참가자들은 실험 종료 후 부작용을 호소했다. 일부는 영화를 볼 때 정사 장면보다도 식사 장면에 더 눈길을 쏟게 된다며 당혹스러워했다. 아예 직업을 바꿔 농사일을 시작한 사람도 나왔다. 연구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정신적 부작용이었다.

최근 출간된 책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의 일부다. 책은 사람의 생각이 결핍에 지배된다고 말한다. 식량이 부족한 사람은 음식을 구하는 데 모든 신경을 쏟고, 시간이 부족하면 일의 우선순위에 집착하며,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은 남들의 표정 읽기에 능숙해진다. 결핍이 만드는 집중력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결핍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때 부작용을 만든다. 앞서 본 실험 참가자들처럼 결핍 극복에만 매몰돼 다른 중요한 가치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되는 이른바 ‘터널링’ 현상 탓이다.

김상훈 실버라이닝솔루션즈 대표

우리 사회도 이런 터널링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최근 화제가 된 구독자 2400만명의 독일 유튜브 채널 쿠르츠게작트(Kurzgesagt)에서 만든 “한국은 끝났다”라는 영상을 보며 든 생각이다. 이 영상은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다뤘는데, 출산율이 0.7 언저리인 대한민국은 2060년이면 인구가 3500만명으로 줄고, 절반이 65세 이상 노인이 돼 소멸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외국의 유튜버는 충격을 받았지만, 한국인들은 이 와중에도 나름의 준비를 시작한 듯 보인다. 석박사 유학생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두뇌 유출’, 중산층의 미국 주식 등 해외 자산 구매 열기, 인구 감소를 피해 서울로만 집중되는 부동산 투자 등등. 각자도생이란 비판도 있지만, 이 문제도 결핍과 터널링의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의 결핍은 빈곤이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이나 ‘금 모으기 운동’ 같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끝내 빈곤을 탈출했다. 하지만 마치 굶는 실험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식사 장면에 집착하고 농사를 시작했던 실험 참가자들처럼, 한국인 역시 빈곤이라는 결핍을 벗어난 뒤에도 쉽게 다른 목표를 떠올리기 어려워진 터널링에 빠진 건 아닐까.

책에는 32개 수술실을 가진 세인트존스 병원의 일화도 나온다. 이 병원의 연간 외과수술은 3만건에 이르렀고 수술실은 늘 부족했다. 응급 환자라도 생기면 의사들은 새벽에도 수술실에 불려 나왔다. 이 문제는 의외로 간단히 해결됐다. 외부 자문관이 수술실 하나를 계속 비워두라고 조언한 것이다. 수술실 부족에 시달리던 의사들은 강하게 항의했지만, 병원은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응급수술이 기존 일정을 흔들지 않게 됐고, 연간 수술 건수는 오히려 늘어났다. 결핍에 강제로 여유를 만들자 생긴 변화였다.

“한국은 끝났다” 영상은 2060년을 ‘한국의 끝’인 듯 묘사한다. 그런데 2060년을 전후로 한국에서는 ‘21세기에 태어난 유권자’ 수가 처음으로 ‘20세기 투표권자’를 능가하게 된다. 즉, 한국의 끝이란 어쩌면 터널에서 자유로운 세대의 새로운 시작이다. 그렇다면 우리 세대도 내가 먼저 부족한 수술실을 차지하려 경쟁하는 대신, 다음 세대가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급하지만 수술실을 하나 비워주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김상훈 실버라이닝솔루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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