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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전의 어느 새벽. 휴대폰이 ‘띠링’ 하고 울렸다. 투자한 가상화폐가 설정해둔 가격에 도달했다는 알림이었다. 가상화폐 단타 투자의 생명은 스피드다. 곧바로 거래소 앱을 실행해 매도를 눌렀고, 터치 몇 번으로 100만원 넘는 수익금이 계좌에 꽂혔다.

가상화폐 투자자들은 비슷할 텐데, 코인으로 돈을 벌면 ‘지름신’이 강림한다. 매년 봄가을만 되면 사겠다고 벼르다가도 가격표를 보고 돌아섰던 프랑스 유명 브랜드 긴팔 티셔츠 4장을 질렀다. 1장에 11만8000원 하는 것을 10% 할인까지 받아 샀으니 ‘이걸로 이번 가을은 충분히 날 테니, 난 합리적인 소비를 한 거야’라는 정신승리까지 곁들이면서.

남정훈 경제부 기자

코인으로 번 돈의 절반가량을 과감하게 지르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한 달을 열심히 일한 대가가 들어오는 25일 월급날에도 이런 소비를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아니요’였다.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벌었든,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벌었든지 다 똑같은 돈이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서 코인으로 번 돈은 쉽게 쓸 수 있는 ‘불로소득’, 월급은 신중하게 써야 하는 ‘근로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여두고 있었던 것이다.

2009년 대학시절 들었던 핵심교양 수업 ‘현대사회와 심리’가 떠올랐다.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자신이 쓴 ‘프레임’이란 저서를 통해 우리가 돈에 다 갖가지 붙이는 ‘이름 프레임’이 지혜로운 소비를 방해하는 훼방꾼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넷플릭스를 결제할 때 가격을 ‘월 1만4500원’으로 보면 ‘그래, 술 한 잔 덜 먹으면 충분히 쓸 수 있는 돈이야’라며 ‘푼돈’으로 이름붙여 쉽게 결제하곤 한다. 반면 ‘1년 17만4000원’이란 가격표를 보면 제법 가격이 나가는 것처럼 느껴져 결제를 주저하게 된다. 결국 둘 다 똑같은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랜만에 프레임을 책장에서 찾아 다시 읽었다. 나는 코인으로 번 돈을 ‘공돈’이란 이름으로 프레이밍해 쉽게 썼고, ‘원래 가격’이란 함정에 넘어가 할인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기까지 했던 셈이다.

“100만원짜리 물건을 50% 할인받아 사면 우리는 50만원을 번 것 같은 기분에 취하곤 하는데, 사실은 50만원을 쓴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던 교수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12년이 지나도 수업 내용이 어렴풋하게 기억날 정도로 ‘돈은 그저 돈’이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난 이름 프레임에 넘어가 지혜로운 소비를 하지 못한 것이다.

9월 초 전국민의 약 90%에게 재난지원금 25만원이 지급되면서 쇠고기 가격이 5% 뛰었다고 한다. 이전에도 재난지원금 지급 때마다 쇠고기 가격은 요동쳤다. 다들 재난지원금에 ‘공돈’이란 이름을 붙여 평소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 쇠고기를 먹었기 때문일 테다. 월급이든 재난지원금이든 돈은 똑같은 돈이다. 돈에 여러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큰 부자는 될 순 없어도 지혜로운 소비자는 충분히 될 수 있다. ‘빚투’(빚내서 투자)에 열 올리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빌린 돈은 결코 내 돈이 아니다. 언젠간 갚아야 할 빚이고, 빌린 돈이라고 더 수익이 날 것이란 기대는 말아야 한다. 공돈이란 없다. 어차피 없었던 돈, 어차피 써야 할 돈도 없다. “이 돈 없다고 안 죽어”라며 돈을 막 쓰지 말자. 돈에는 이름이 없다.


남정훈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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