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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치유하는 침묵과 기다림…영화 '비밀의 정원'

입력 : 2021-04-06 09:26:37 수정 : 2021-04-06 09: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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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픽쳐스 제공.

"나 오빠한테는 그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정원(한우연)은 남편 상호(전석호)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사를 준비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정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10년 전 전 정원을 성폭행한 범인을 잡았다는 경찰의 연락. 애써 찾은 평온은 과거의 기억 앞에 힘없이 깨진다.

정원은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운 동시에 상호에게 과거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짓말을 한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든다. 사건 이후 정원을 키워온 이모(염혜란)와 이모부(유재명)는 그런 정원이 안쓰럽기만 하다.

이모는 정원에게 "네 입 떨어질 때 말해"라며 다독이지만, 집에 방문한 경찰로 인해 상호에게도 과거의 일이 알려지게 된다. 상호는 정원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지만, 정원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상호가 운을 떼도 정원은 회피해 버린다.

영화는 정원의 고통과 상호의 답답함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담아낸다. 이들은 극적으로 분노를 터트리지도 않고, 슬픔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너무 큰 상처는 들춰보기 힘든 법이다.

[몬순픽쳐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대신 수영 강사인 정원은 물속에 가라앉아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으로 아픔을 드러낸다.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는 괴로움이 정원의 고통을 고스란히 전한다. 상호는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 주차된 차에 앉아 그날의 사건 일지를 들여다보며 아파한다.

정원과 상호를 바라보는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정원에게 안부 전화 한번 하기가 조심스러운 이모와 복잡한 상호의 마음을 다잡아 주고 싶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이모부. 이들은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여기에 더해 그날 일을 다 잊고 살라며 딸을 서울로 보낸 정원의 엄마와 자신 때문에 언니가 나쁜 일을 당했다며 죄책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동생도 있다. 이들은 가장 힘들 정원을 위해 자신들의 아픔을 조용히 삭인다.

그렇다고 상호와 가족들이 정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묵묵히 기다리는 중이다. 정원이 스스로 침묵을 깰 수 있도록, 치유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정원도 그런 가족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몬순픽쳐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영화는 전반적으로 잔잔하고 따뜻하다. 각자 아픔을 지닌 인물들을 바라보는 배려 깊은 시선도 돋보인다. 박선주 감독의 첫 장편으로 단편 '미열'을 확장한 작품이다. 박 감독은 DNA 대조를 통해 미제사건의 범인이 붙잡혔다는 기사를 보고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피해자와 그 가족의 삶을 영화로 기획하게 됐다고 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호연으로 대사 없이 침묵만 흐르는 장면에서도 인물의 심리가 잘 전달된다. 정원과 상호를 각각 연기한 한우연, 전석호는 '미열'에도 함께 출연한 만큼 자연스러운 호흡을 보여준다. 특히 한우연은 이번이 첫 장편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괴로움과 미안함, 고마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염혜란과 유재명도 깊은 연기 내공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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