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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악플러들의 무더기 사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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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6-14 23:24:19 수정 : 2021-06-14 23: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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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기분만 나빠져서 댓글 안 본 지 오래됐어. 다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뉴스기사 댓글란을 확인하느냐는 질문에 적잖은 지인들이 이렇게 답했다. 댓글 작성은커녕 최근엔 읽기조차 꺼려진다는 대답이 쏟아졌다. 댓글창 속 부정적 기운에 매번 눈살이 찌푸려진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과도하게 비난하거나 음모론을 펼치거나 혹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분노를 배설하는 데에 열중하는 일부 댓글러들의 점유율이 높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 이 악성댓글의 심각성을 크게 실감한 사례는 ‘한강 대학생 사건’이다. 지난 4월 말 숨진 대학생의 친구 A씨를 향해 한 달 넘도록 가해진 인신공격성 악플은 양과 질 모두 도를 넘는 수준이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A씨 측은 이달 4일 가짜뉴스 및 명예훼손성 댓글을 단 누리꾼 수만명을 대상으로 무관용 고소전을 예고했다.

놀랍게도 단 나흘 만에 선처를 요청하는 이메일이 1000건 가까이 쏟아졌다. 이들은 ‘로펌’의 요구대로 자신이 쓴 악플 등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보냈다. 그토록 날 선 언어로 누군가를 공격하던 이들의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반성이었을지도 의문이지만, 더 허탈한 지점은 이것이다. 만약 A씨가 법적 대응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사과문과 악플의 자진 삭제가 가능했을까.

법적 대응 이후 대량의 사과문이 도착한 사안은 A씨 사례만은 아니다. 지난 4일 비혼여성 커뮤니티 ‘에미프’(emif)는 최근 진행한 500여건의 악플 고소 과정에서 받은 여러 통의 자필 사과문 편지를 유튜브로 생중계 낭독했다. 이들은 인터뷰 기사 등에 달린 다량의 악플을 고소하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공익을 위해 추후 공유하겠다고 밝혔다.

정지혜 사회2부 기자

법이라는 ‘최후의 보루’에 기대고서야 겨우 사이버테러 폭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건 우리 사회 시민성의 초라한 현주소를 드러낸다. 시민교육은 뉴미디어 시대에 걸맞게 업데이트되지 못했고, 악플러와 ‘어그로꾼’(관심받기 위해 무리한 도발을 일삼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며 피해자를 양산해 왔다. 이들이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공적 기준을 제시하고, 선을 넘는 ‘트롤링’(관심유발성 공격)에 제동을 걸어야 할 정치나 언론, 지식인 등도 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이러한 ‘광장’에 환멸을 느낀 시민은 사회·문화적 자정을 촉구하기보다 안전한 자신만의 ‘밀실’로 숨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A씨들은 홀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무자비한 댓글 공격에 가담함으로써 자신이 알량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믿는 이들의 삶이라고 풍요로울 수 있을까. 타인을 향한 기본적 예의와 수치를 모르고 드러내는 원색적인 적의는 척박한 자신의 마음을 ‘자기소개’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우리 또한 스스로를, 더 나아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행동할 용기를 내야 할 것이다. 각자의 밀실 속에서 운신 폭을 줄이기보단 공동체로서도 대응을 고민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A씨와 같은 이들의 법적 대응은 그나마 작동하는 방어수단이자 그동안 손 놓았던 시민교육을 조금이나마 보완할 차선책이 되고 있다.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이들의 행보에 응원을 보탠다.

 

정지혜 사회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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