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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살며] 고려인 3세의 한국 정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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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6-02 23:08:52 수정 : 2021-06-02 23: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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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장 동료이자 고려인(재러시아 한인) 3세가 한국에 오게 된 이야기다. 결혼이민자인 그의 어머니는 한 번도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주부이었다. 일찍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혼자 힘으로 6명의 아이를 키웠다. 그런 어머님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여자는 결혼할 때 남편은 100세까지 산다’고 믿고 결혼을 하지만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1남5녀의 중 둘째로 태어나 책임감이 강하고 사실상 맏딸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결혼 후에는 남편만 믿고 가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녀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는 가정에서 열심히 아이를 키웠다. 엄마 손이 덜 필요하게 됐을 때 운 좋게 일자리를 찾았다.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으로 온 것은 21년이 됐다. 그는 모국에서 일하면서 통신대학교를 다녔고 독일어 교사로도 일했다.

하타 치주요 서울교대 교육전문대학원생·다문화전공

1991년 소련 공산당이 해체되어 15개국이 분리 독립해 독립국가연합(CIS)을 형성했고, 원주민들이 실권을 잡아 민족어와 민족사를 되찾고 민족 정체성을 확립해갔다. 그러나 소련의 지원이 끊어지며 새로 독립한 나라들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미국, 유럽, 러시아로 건너갔다. 특히 교육열이 높아 성공한 삶을 살았던 고려인들도 소련 해체로 사회적 위상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일해도 월급이 늦게 나오거나 지급되지 않는 일이 계속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는 남편을 소개받았다. 할머니가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이질감이 없었다. 만나보니 좋은 사람이어서 굉장한 용기를 냈다. 외할머니의 나라여서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없는 백지상태였다.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고려인 문화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특히 아무리 같은 피가 흘러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역시 외국인임을 실감했다. 그의 모국은 100개 이상의 민족이 있고 여러 민족이 섞여 있는데도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해 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말을 못해 사소한 일에도 남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다.

한민족의 연해주 이동은 1863년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가난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독립운동, 민족운동을 위한 것으로 변모해갔다. 그러던 중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모든 한인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를 당했다. 초창기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한 고려인들은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한인 집단농장을 개척하며 적응했다. 그러나 공공장소에서 민족어 사용을 금지했던 정권에서 고려인은 점차 한국어를 배우지 않게 됐다.

2000년 이후 고려인의 한국 귀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자신의 본래 뿌리이자 조상의 땅인 한국으로 부푼 꿈을 안고 돌아오고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어려운 환경에 직면할 것이지만 꾸준히 노력해서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들이 바라던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하타 치주요 서울교대 교육전문대학원생·다문화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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