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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세상은 이변의 연속… 어리석은 게 아니라 운이 없었다

입력 : 2021-05-11 10:00:00 수정 : 2021-05-10 20: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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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기회를 놓친 기업들을 위한 변명

삼성, 구글 앞서 안드로이드 인수 기회
당시의 애플 iOS와 격차 크자 한발 빼

英 리버풀에서 인기끌던 비틀스도 비슷
데카 레코드, 녹음했지만 EMI가 계약

조던, 아디다스 좋아했으나 작은 키 탓
계약 못해… 나이키 품에 안겨 시장 군림
EMI 스튜디오가 있는 애비로드를 건너는 비틀스 멤버들. 1962년 1월 데카 레코드는 비틀스가 성공할 가망성이 없는 뮤지션이라고 판단하고 계약을 거부한다. 비틀스는 그해 6월 EMI와 계약한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은 애플의 iOS와 구글의 안드로이드, 두 개의 운영체제(OS, operating system)가 양분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스마트폰’을 처음 만들어낸 애플은 미국 시장에서 60%를 장악하고 있지만, 전 세계에서는 안드로이드가 87% 가깝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늦게 출발한 안드로이드가 더 많은 시장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제조사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에 탑재할 수 있도록 라이선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고, 삼성전자는 이를 사용해서 세계에서 애플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스마트폰의 강자가 되었다.

물론 삼성은 구글에서 운영체제를 빌려 사용하는 대신 자신만의 운영체제를 갖고 있다면 훨씬 더 유리한 고지에서 사업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인수하기 전에 삼성이 먼저 인수할 수 있었다. 2004년 안드로이드 체제를 만들고 있던 앤디 루빈이 팀원 몇 명을 데리고 서울에 와서 삼성 측과 미팅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삼성의 임원이 “고작 여섯 명으로 그걸 만들겠다고 하느냐”며 웃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루빈은 바로 2주 후에 구글과 미팅을 가졌고, 구글은 50만달러라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적은) 액수에 안드로이드팀을 사버렸다. 여기까지가 삼성이 안드로이드를 놓친 이야기다.

하지만 삼성이 그때 안드로이드를 샀으면 지금의 구글과 같은 세계적인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당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폰을 닮은 운영체제가 아니었다. 구글이 안드로이드를 인수해서 몇 년 동안 열심히 개발한 후에 2007년 선보인 첫 안드로이드폰은 당시 나오던 일반적인 스마트폰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반면 같은 해에 애플이 내놓은 첫 아이폰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스마트폰이었다.

아이폰을 보고 충격을 받은 구글은 앤디 루빈의 안드로이드 계획을 포기하고 아이폰을 닮은 지금의 모양으로 바꾸는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삼성이 제 발로 걸어들어온 안드로이드를 차버렸다”고 말하기에는 2004년의 안드로이드는 너무나 달랐고, 사실상 구글이 새롭게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보는 게 맞다.

2004년 서울에서 열린 미팅과 비슷한 미팅이 1962년 1월1일 오전 10시 런던에서도 있었다. 장소는 세계적인 음반사인 데카(Decca) 레코드의 스튜디오. 당시 영국의 리버풀에서 인기를 끌고 있던 네 명의 젊은 뮤지션들과 계약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한 녹음 세션이었다. 그룹 이름은 비틀스. 보통 이 경우 다섯 곡 미만을 녹음하지만, 이날 비틀스는 점심식사 후에도 녹음을 계속해서 무려 15곡을 녹음했다.

한 달 후 데카 레코드는 비틀스와 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타(를 치는) 그룹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있고”, “비틀스는 쇼 비즈니스에서 미래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데카로부터 퇴짜를 맞은 비틀스는 3개월 후에 EMI 레코드와 계약했고, 곧이어 비틀스는 전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으며, 데카 레코드는 “비틀스를 못 알아본 음반사”라는 조롱을 받아야 했다. 그해 6월 런던의 EMI 스튜디오에서 처음 녹음한 비틀스가 스튜디오가 있는 애비로드(Abbey Road)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진은 비틀스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데카 레코드는 왜 비틀스와 계약하지 않았을까. 그날 비틀스가 부른 곡들을 들어보면 비틀스의 잠재력을 확인하기 힘들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평가다. 훗날 잘 알려진 비틀스 특유의 매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EMI와의 계약도 거의 불발되었다가 맺어졌다. 비틀스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틴이 애를 썼지만, 프로듀서들은 일제히 계약에 반대했고, 결국 EMI의 하위 브랜드인 팔로폰(Parlophone)이 비틀스와 계약한 것이다.

혹자는 데카 레코드가 “기타 그룹은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고 말한 것도 사실은 비틀스가 실력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걸 피하기 위해 가져온 핑계였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팝송의 역사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그룹이라면 당시 인기였던 가수들과는 다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새로운 음악이 성공할 거라 믿고 계약하는 건 (음악계에서 아주 드문 일은 아니지만) 리스크가 큰 베팅일 수밖에 없다.

조던이 프로가 되면서 스폰서 계약을 원했지만 아디다스가 거부했고, 결과적으로 나이키를 세계 1위의 스포츠 용품 브랜드로 키우는 계약이 탄생할 수 있었다.

1984년에는 스포츠용품을 만드는 아디다스가 데카 레코드와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그해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세 번째로 지명된 신인 선수가 대학선수 시절 즐겨신었던 아디다스와 계약을 원하는데, 키(198㎝)가 작은 게 걸렸던 거다. 결국 계약하지 않겠다고 하자 그 선수는 아디다스 측에 “정말로 하지 않겠느냐”며 재차 확인했고, 아디다스는 그 말을 듣고도 그 선수와 계약하지 않았다. 그 선수는 NBA의 전설 마이클 조던이다.

조던이 아디다스에 다시 물었을 때 그는 이미 나이키에서 오퍼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디다스에 한 번 더 물어봤을 만큼 조던은 아디다스 브랜드를 사랑했다.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에서도 대학선수였던 조던이 인터뷰에서 자신이 아디다스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나이키가 세계 스포츠용품 시장에서 군림하게 된 시대였고, 그 원동력은 마이클 조던을 동원한 ‘에어 조던’ 마케팅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 만큼 나이키는 조던으로 인해 엄청난 수혜를 입었다. 지금은 스포츠 스타를 동원한 마케팅이 자리를 잡았지만, 현재의 마케팅 방법론은 사실상 나이키의 조던 마케팅이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디다스는 왜 그렇게 계약을 간절하게 원하는 조던에게 ‘노’라는 답을 하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포기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그들에게는 조던의 키가 큰 문제였다. 조던이 세 번째로 드래프트된 그해에 첫 번째 드래프트는 213㎝의 장신 센터 하킴 올라주원이었고, 두 번째였던 샘 보위는 그보다 더 큰 216㎝였다. 신인들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의 미국 프로농구는 윌트 체임벌린, 카림 압둘 자바처럼 7피트(213㎝)가 넘는 장신 선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마이클 조던 정도나 그 이하의 키를 가진 선수들 중에서 MVP가 된 선수는 단 두 명밖에 없었을 만큼 키는 곧 실력을 의미하던 시절이었고, 당시 스타들 중에서는 작은 편에 속했던 래리 버드나 매직 존슨도 마이클 조던보다는 큰 선수들이었다.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스폰서 계약을 해야 하는 임원의 입장에서 드래프트 3위의 키가 작은 선수와 계약하기 힘들었던 건 당연하다. 판단은 데이터를 통해 해야 하고, 데이터에 따르면 조던은 큰 성공을 할 선수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든 이변은 일어나고, 이변이 일어날 때 관중은 환호한다. 아디다스가 어리석었던 게 아니라 나이키가 운이 좋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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