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체 개선만으로는 부족… 입법 보완 병행해야
지난 3일 지방선거에서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일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동나 유권자들이 발길을 돌렸고, 어떤 곳에서는 다른 지역의 개표가 시작된 뒤에야 뒤늦게 투표가 진행됐다. 투표용지가 없어 시민이 투표하지 못하는,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이는 특정 후보의 유불리를 넘어 선거관리의 국가적 역량과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흔든 사건이다.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작업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차분히 원인을 따져보고 선관위 개혁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우선, 출발점은 독립성과 책임성의 균형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선관위는 정치권력의 영향 아래 놓이면 선거의 중립성 자체가 흔들리는 만큼, 정권과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나 독립성은 면책특권이 아니다. 독립 헌법기관이라는 지위가 행정과 인사, 예산과 현장 관리에 대한 외부 검증까지 거부하는 근거가 된다면, 독립성은 민주주의의 방패가 아니라 견제받지 않는 성역으로 흐를 수 있다. 지난해 헌법재판소도 감사원의 직무감찰을 위헌으로 보면서, 동시에 이것이 선관위를 성역으로 인정하는 뜻은 아니라며 자체 대응책을 주문했다. 따라서 개혁은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선관위가 독립적 외부 감사기구의 정기적 감독을 받도록 제도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다음은 선거관리의 무게중심을 공급자에서 유권자로 옮기는 일이다. 그동안 선관위는 공직선거법의 잣대로 후보자와 유권자의 행위를 단속하는 규제 업무에 치우친 나머지, 참정권 보장과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더 큰 헌법적 가치를 충분히 살피지 못한 면이 있다. 선거관리는 위반 행위를 적발하는 규제 중심 행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유권자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불편 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 선거 과정에서 정치적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권리 보장 행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선관위의 역할도 감시와 통제를 넘어, 시민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데 맞춰져야 한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도 선거 사무를 행정 비용의 관점에서 다뤄온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냈다. 투표용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주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공공 인프라다. 따라서 물량 수요도 평균 투표율이나 관행적 예측이 아니라,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는 단 한 명도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접근해야 한다. 일정 비율의 예비 용지를 의무화하고, 시간대별 투표 쏠림과 돌발 상황까지 반영한 비상 물량 체계를 갖춰야 한다.
동시에 선거관리 운영 체계도 재난관리 수준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선거는 하루 동안 전국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고위험 공공 업무다. 투표용지의 인쇄·수송·잔여 수량을 실시간으로 관리하고, 부족 징후가 보이면 사전 경보와 권역별 비상 배송이 즉시 작동해야 한다. 현장 데이터로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예측 행정, 투표관리관의 권한과 책임을 분명히 하는 현장 매뉴얼, 용지 부족·장비 고장·대기 유권자 급증에 대비한 비상계획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이번 사태로 드러난 투·개표 절차의 공백도 메워야 한다. 한쪽에서는 개표가 진행되는데 다른 쪽에서는 투표가 계속되는 상황은 절차적 평등에 중대한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현행 공직선거법은 이러한 예외 상황을 충분히 예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일정 규모 이상의 투표 지연이 발생할 경우 해당 선거구의 개표 개시를 일시 보류하는 기준, 투표시간 연장의 요건과 결정 주체, 피해 유권자를 위한 신속 구제 절차를 법률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선관위의 자체 개선만으로는 부족하며, 국회의 입법적 보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부실한 선거관리는 작은 오류조차 전체 선거에 대한 불신으로 키우려는 음모론의 토양이 되고, 그 불신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를 더욱 깊게 만든다. 선거는 결과만 공정해서는 부족하다. 과정이 투명하고, 위기 대응이 예측 가능하며, 사후의 책임이 분명해야 한다. 이번 일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선관위를 약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핵심 기관에 걸맞게 더 단단하고 더 투명하며 더 책임 있는 기관으로 다시 세우자는 것이다.
이재묵 한국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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