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의 두 얼굴: 성녀와 이단자
1310년 6월 1일, 파리 그레브 광장. 하얀 백사장에 쌓인 장작더미에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군중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화형대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심판관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네가 주님의 신부라는 것을 부인하라! 살려주겠다!”
마르그리트 포레트는 고요히 대답했다.
“저는 주님의 사랑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제 영혼의 생명이며, 그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포레트는 이단죄로 화형 당했다.
앞서 1179년 9월 17일, 독일 빙엔의 루퍼츠베르크 수녀원. 한 여인이 숨을 거두었다. 힐데가르트. 교황과 황제가 그녀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고, 사후 교회는 그녀를 성녀로, 나아가 교회 박사로 추대했다.
같은 신부 영성을 품었지만, 한 여인은 이단자가 되었고, 한 여인은 성녀가 되었다. 그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무엇일까?
사랑의 신비: 영혼과 신랑의 합일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은 8세에 부모를 떠나 수녀원에 들어갔다. 38세에 수녀원장이 된 그녀는 비전을 통해 신학서, 치료서, 음악을 창작했다. 그녀의 시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사랑을 노래했다.
“가장 깊은 자리에서 / 하나님이 내 영혼과 입 맞출 때 / 열망이 속을 채우고 / 은총과 축복이 쏟아져 내린다 ... 나는 당신이 타는 칠현금 / 부드러운 손길에서 나오는 가락 / 그 음조는 내 것이 아닌 것 ... 하나님 나는 당신의 작품”
포레트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발렝시엔느에서 베긴회 여성으로 살았다. 베긴회는 13세기 초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등장한 여성 신앙 공동체다. 설립자도, 통일된 규칙도 없이 기도와 노동, 금욕과 봉사 활동을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포레트는 ‘단순한 영혼의 거울’에서 영혼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주장했다. 그 마지막에 영혼은 신랑이신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며, 창조 이전의 무의 하나님과 결합한다.
두 여인 모두가 자신을 “주님의 신부”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처럼,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했다. 이러한 신앙적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설고 미스터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과 하나 되기를 갈망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를 생각하면, 그들의 체험을 이해할 수 있다.
힐데가르트는 평생 동정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어 살겠다고 맹세했다. 그녀에게 금욕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더 깊이 세상을 섬기기 위한 준비였다. 그녀는 병자를 치료하는 의술을 연구했다. 보석을 이용한 치료법을 개발했고, 실제로 많은 병자를 고쳤다. 또한 부패한 성직자들의 양심을 일깨우러 설교 여행을 다녔다.
포레트는 베긴회에서 자발적으로 고행과 금욕, 청빈과 노동을 실천했다. 베긴회 여성들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살았다. 신비 체험을 농도 짙은 미각적 감각으로 표현한 독일 마그데부르크 출신의 여성 신비가 메히틸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너는 고통의 쓴 잔을 마시되 미덕의 불쏘시개로 사랑의 불을 지펴라.”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오셨듯이, 그의 신부들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내려갔다.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세상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영성의 본질이었다.
교회와 영성의 긴장: 보호와 심판
중세 교회는 이러한 여성 신비주의자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고해성사를 맡은 신부들이 교황의 첩자 노릇을 했다. 그들은 여성들의 영적 체험과 사상을 살폈고, 교리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면 교회 당국에 보고했으며, 이단 심문에 넘겼다.
그러나 일부 의인이 있었다. 이들 성직자는 여성들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보호했다. 그들은 여성 신비가들의 저술을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가다듬어 주었다. 위험한 표현은 순화시키고, 교리와 충돌할 수 있는 부분은 신학적으로 정당화해 주었다. 이러한 협력이 없었다면 많은 영적 유산이 불길 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힐데가르트에게는 수도사이자 고해신부인 조력자 폴마르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비전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도우며 교회의 인정을 받게 했다. 그녀는 교회의 권위 안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받은 계시는 교회의 교리를 보완하고 심화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교황과 황제가 그녀를 존경했고, 성녀로 추대했다.
포레트에게도 고해신부 구아르가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폴마르는 힐데가르트의 비전을 정통 신학 안에서 해석하도록 도운 수도사였고, 구아르는 포레트의 신비사상을 옹호하다가 그녀와 함께 이단으로 단죄된 비운의 조력자였다는 점이다. 당시 판단의 기준은 여성 신비자의 사상과 행동이 교황을 정점으로 한 교권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졌는가에 있었다. 교회는 처음에는 신령한 여인들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지만, 태도가 돌변했다. ‘무가 되어버린 영혼’ 또는 ‘자유로워진 영혼’이라는 개념이 교권을 부정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성신비가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독립성이 강해지자, 교회는 위협을 느꼈고, 살벌한 이단 심문이 시작되었다.
교권 세력은 포레트에게 책을 회람하지 말 것과 ‘주님의 신부’라는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포레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책은 금서가 되었고, 불태워졌다.
교회와 신령한 여인들이 충돌한 핵심은 네 가지였다. 첫째, 성직자의 중재 없이 하나님과 직접 교통한다는 주장. 둘째, 성서를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 셋째, 제도권을 벗어난 자유로운 신앙생활. 넷째, 여성이 영적 권위를 통해 교회의 위계질서를 흔들었다는 점이다.
1310년 파리 광장, 마지막 심문이 열렸다. 심판관은 포레트를 “가짜 신부”, “이단자”라고 단죄했다. 그러나 포레트는 자신의 믿음을 굳게 지켰다. 불길이 타올랐다. 그녀가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며 죽기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 자체가,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증명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생명보다 귀했다.
힐데가르트와 포레트. 두 여인은 같은 신부 영성을 품었지만, 한 사람은 교회 박사가 되었고 한 사람은 화형대에 올랐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한다. 둘 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신부였다고. 교회의 인정 여부가 신부의 진정성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씨의 계승: 한반도의 신부 영성
중세 유럽에서 꽃핀 신부 영성은 시공을 초월해 한반도에 독특한 방식으로 이어졌다. 해방 전후 이용도, 김성도, 허호빈을 중심으로 한 신령집단은 재림이 임박했음을 강하게 느끼며 눈물로 회개했다.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했다. 하루 7천 번 경배를 드렸고, 신랑 예수님과 신부의 옷을 지으며 혼인잔치를 준비했다.
이들은 공산 정권의 종교탄압에도 불구하고 평양이 에덴궁이 될 것이라고 믿고 남하하지도 않았다. 결국 강제수용과 박해가 뒤따랐다. 많은 이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며 생을 마감했다.
이들의 기도와 희생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신앙적 기대와 해석의 배경으로 남아, 훗날 한반도에서 전개된 독특한 영성의 토양이 되었다. 신앙의 길은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진심 어린 구도와 헌신은 언제나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준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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