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엔군사령부 창설 75주년을 기리는 여러 행사가 국내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유엔사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24일 일본 도쿄에서 출범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등 연합국을 이끌고 국군주의 일본을 격파한 더글러스 맥아더 미군 원수에게 이번에는 ‘세계 각국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을 지휘해 한국 영토에서 침략군을 몰아내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어찌 보면 그때가 유엔의 최전성기였다. 6·25 전쟁 이후로도 지구촌 곳곳에서 무력 충돌이 빈발하고 있으나 ‘유엔사’의 이름으로 조직적인 군사 작전을 전개한 사례는 없다. 1957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긴 유엔사는 여전히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또 전무후무한 기구로 남아 있다.

한국은 사실상 유엔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한반도를 접수한 미국·소련(현 러시아) 양국은 새 정부 수립을 놓고 옥신각신 다퉜다. 소련과의 양자 협상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다고 여긴 미국은 이 사안을 유엔에 넘겼다. 하지만 소련과 소련군 점령 하의 북한은 유엔의 관여 및 개입을 일절 거부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8년 8월 이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을 하는 남한 단독 정부가 출범했다. 유엔은 회원국의 절대 다수인 48개국이 찬성한 가운데 한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에서 유엔의 권위는 참으로 대단했다. 이승만정부는 유엔군이 6·25 전쟁에 참전한 1950년부터 매년 10월24일을 공휴일인 ‘국제연합일’(유엔데이)로 지정해 기렸다. 유엔 창립이 1945년 10월24일 이뤄진 것을 기념하는 의미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유엔 회원국의 세력 판도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반미(反美)·반서방 성향의 신생 독립국들이 속속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하며 북한은 인기가 올라간 반면 한국의 주가는 떨어진 것이다. 급기야 1976년 북한이 유엔은 아니지만 그 산하 기구의 정식 회원국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상 유엔이 더는 한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당시 박정희정부는 강한 유감을 표하고 유엔데이를 공휴일에서 제외했다.

18일은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91년 9월18일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한 날이다. 탈냉전의 시대적 흐름을 잘 짚은 당시 노태우정부가 기민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한 결과혔다. 그때까지 한국은 소련의 반대로, 북한은 미국의 반대로 둘 다 유엔 회원국이 되지 못한 채 수십년간 유엔 밖에서 ‘장외 투쟁’을 하는 데 그쳤다. 어렵사리 유엔에 진출한 뒤 한국은 ‘늦깎이’ 회원국의 한계를 딛고 유엔 사무총장(반기문)을 배출했다. 또 유엔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에 해당하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을 두 차례 지내고 현재 세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다. 유엔의 위상이나 역할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앞으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외교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데 유엔이 가장 중요한 무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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