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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에게 뺏긴 핵심 기술 매년 피해 1000억 육박 [대기업 기술탈취, 고달픈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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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9-13 06:00:00 수정 : 2021-09-13 0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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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기술탈취 산업계 전반 아직도 만연

완성차업체부터 금융사까지 막강한 자본 이용 ‘을’ 울려

신용카드 P2P 기술 첫 개발 ‘팍스모네’
국내 유명 카드회사와 지루한 법정 다툼
직원들 뿔뿔이 흩어지고 창업자만 남아
“스타트업 기술 가로채 혁신 서비스 포장
법의 허점 악용 기술 빼앗는 건 인생탈취”

악취제거 미생물 전문기업 ‘비제이씨’도
완성차업체에 기술 빼앗기고 7년째 송사
특허청 등 당국 손해배상 권고도 안먹혀
기술분쟁조정위 접수건 연 20건 채 안돼
거래관계 유지 위해 참는 경우 훨씬 많아

“법의 허점을 악용해 기술을 빼앗고 이익을 편취하는 건 ‘기술 탈취’가 아닌 ‘인생 탈취’ 아닐까요.”

 

지난 9일 수화기 넘어 들려온 핀테크(금융기술) 스타트업 팍스모네 홍성남 대표의 목소리는 잔뜩 풀이 죽어있었다. 억울한 감정이 가득 밴 말투였다. 벌써 2년째, 팍스모네는 국내 유명 카드사와 지루한 법정 다툼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2015년 팍스모네의 핀테크 기술이 언론 등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됐다.

 

국내 최초로 신용카드 회원 간 결제(P2P)를 할 수 있는 기술이다. 국내(2007년), 미국(2013년), 일본(2013년) 등에서 특허 등록을 받기까지 했다. “특허기술이 소개되자 S카드사로부터 업무협력을 제안받았다. 이제 우리 기술력이 빛을 보겠구나 싶어 성의를 다해 카드사에 결제 송금과 특허 기술을 설명했다”는 홍 대표의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났다.

 

2019년 S사는 팍스모네의 기술과 동일한 서비스를 출시했다. 이후 정부가 새로운 서비스가 출시될 때 일정 기간 기존 규제를 면제, 유예시켜주는 ‘규제 샌드박스’로 지정돼 유료 서비스로 제공되기 시작했다. 팍스모네의 기술은 여전히 금융당국의 허가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S사는 이 특례 속에서 권리를 인정받은 것이다.

 

홍 대표는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 따낸 독자적인 기술이 감쪽같이 카드사의 혁신기술로 포장됐다고 주장한다. 줄기차게 카드사에 원만한 해결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은 ‘특허등록 무효심판’ 제기였다.

 

홍 대표는 “엄청난 자금과 시간을 쏟아부어 만든 노력의 성과를 거대 카드사가 탈취했다”며 “적반하장 격으로 불공정 행위를 감추기 위해 영업방해, 명예훼손을 거론하며 겁박까지 해 스타트업의 노력을 처참히 짓밟고 있다”고 호소했다.

홍 대표는 혁신을 장려할 목적으로 마련된 규제 샌드박스 제도 역시 취지가 퇴색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스타트업의 기술 알맹이를 가로채 혁신 서비스라는 화려한 왕관을 훔쳐 쓰고, 정작 모든 것을 걸고 혁신을 만들어 낸 스타트업을 고사시키려는 행태는 용납해서는 안 될 부도덕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미래를 꿈꿨던 예닐곱 명의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다. 이젠 창업자 둘만 남아 송사를 이어가고 있다. 팍스모네는 지난 5월 서울중앙지법에 특허 침해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홍 대표 사례처럼 우리 산업계 전반에는 여전히 기술 탈취가 만연해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자동차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원·하청 구조 속에 완성차 업체는 ‘절대 갑’으로 여겨진다. 이런 이유로 중소기업을 상대로 한 대기업의 기술 탈취가 더욱 도드라진다.

 

중소벤처기업부 관계자에 따르면 중기부의 중소기업 기술보호 수준 실태조사 결과 매년 수십개 기업들이 피해를 보고 있으며, 연간 총 피해금액도 매년 1000억원에 육박한다.

 

악취 제거 미생물 전문기업인 비제이씨 최용설 대표는 “대한민국은 기술 우위를 가진 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비제이씨는 한 완성차 업체의 협력사로 지난 2004년부터 거래를 이어왔다. 자동차 도장 공정에서 발생하는 맹독성 유기화합물과 악취를 정화하는 미생물제를 개발하여 납품했다. 그러던 중 2013년 완성차 회사는 비제이씨에게 기술 자료를 요구했다. 이후 미생물·실험 데이터를 모 대학에 전달한 이 회사는 해당 대학과 산학과제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고 2015년에 관련 기술 특허를 출원했다. 특허 출원 후 비제이씨에 돌아온 건 계약 해지였다.

 

최 대표는 “독보적 기술로 10년 넘게 업력을 키웠는데 계약 해지까지는 2년이 채 걸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별안간 핵심 캐시카우(수익 창출원) 기술을 빼앗긴 비제이씨는 대응에 나서기로 했다. 2016년 공정거래위원회에 해당 회사를 불공정 하도급 거래행위로 신고한 데 이어 특허청에는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을 문제 삼았다. 특허청은 아이디어 탈취 및 기술 탈취법 위반 사유를 들어 자동차 회사에 시정을 권고하면서 비제이씨의 손을 들어줬다. 중소기업기술분쟁조정위원회는 손해 배상을 권고했다. 하지만 완성차 회사는 두 곳 모두 법적 구속력이 없다며 이행을 거부했다.

 

“7년째 법정 다툼을 이어오면서 사용한 비용만 20억원에 달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최 대표의 하소연이다. 그는 “국내 3대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 7명 정도가 상대편 변호인단으로 꾸려졌다”며 “대기업은 중소기업과의 기술 탈취 소송을 시간 싸움으로 여기고 있다. 지루한 법리 공방 끝에 중소기업이 자포자기하면 탈취 기술은 결국 대기업의 독자 기술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만들고 막대한 수익을 남기지만, 을의 위치인 중소기업이 이를 바로잡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중기부 조사에 따르면 2015년 피해 기업은 59개사, 피해금액이 902억원에 달했고, 이는 3년이 지난 2018년(32개사·1119억원)에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중기부는 “기술 탈취는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악질적인 불공정 거래행위지만 지속적인 정책 마련에도 불구하고 근절이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7년간 공정위로 접수된 기술 탈취 신고건수가 20여건에 그친 점은 중소기업이 넘어야 할 산이 그만큼 높은 현실을 뒷받침한다. 대·중소기업·농어업 협력재단 조사를 보면 중소기업이 기술을 탈취당해도 법적 대응을 하지 않는 이유로 ‘입증 어려움’(66.6%), ‘거래관계 유지’(53.3%) 등을 꼽았다.

 

대기업이 계약 체결 전부터 기술자료를 요구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은 계약체결 실패와 계약 후 거래 단절 우려 등의 이유로 거절을 못하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실제 중소기업기술분쟁조정중재위에 접수된 건수도 1년에 20여건이 채 되지 않으며, 조정안이 성립되는 경우는 매년 2∼3건으로 더욱 드물다.

 

중기부 관계자는 중소기업 기술 탈취에 대해 “자료 제공 시 관련서면을 미발급받거나 대기업 주도로 작성한 서면을 통해 자료를 제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제공된 기술자료는 기술 유용이나 납품단가 인하 등에 악용된다”고 설명했다.


김용언 기자 Dragonspeec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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