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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명절음식·밭일까지… 보훈대상자들 몸종 부리듯 [심층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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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6-15 06:00:00 수정 : 2021-06-15 10: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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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섬김이의 ‘16년 피해 호소’ (하)
페인트칠 시키거나 대청소 요구는 약과
“전기료 아깝다”… 세탁기 쓰지 말라는 집도
하루 평균 6시간 고강도 노동에 ‘파김치’
보훈대상자 자녀들까지 아랫사람 취급
육체 고통보다 비인격적 대우 더 힘들어

“가사 위주 업무로 정형외과 진료 경험” 80%
업무 범위 지침 있지만 현장선 무용지물
“지침에 적혀 있는 대로만 수행” 13% 그쳐
무리한 요구 거절 땐 막말·보훈처에 민원
“부려먹어도 되는 사람”… 보훈처, 갑질 조장

“저희는 국가보훈처가 보낸 공식적인 ‘노예’예요.”

15년째 ‘보훈섬김이’(보훈대상자에게 재가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로 일해 온 김경숙(가명·63)씨는 자신을 ‘몸종 부리듯’ 대하는 보훈대상자들을 만날 때면 일에 회의를 느낀다고 했다.

보훈섬김이는 간단한 가사와 식사 수발, 말벗, 동행 산책 등을 통해 보훈대상자들의 일상생활을 돕는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무엇이든 시켜도 되는’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밭일이나 페인트칠을 시키거나 대청소를 요구하는 것은 약과다. ‘전기요금이 아깝다’며 세탁기를 쓰지 말고 발로 밟아 빨래해 달라는 집도 있다. 보통 한 집당 2시간씩, 하루에 3가정을 다니는데 이렇게 궂은일을 하다 보면 몸은 늘 녹초가 된다.

과도한 요구에 ‘이런 일은 시키면 안 된다’고 하거나 힘든 내색을 보이면 ‘보훈처에 이야기하겠다’는 으름장이 돌아온다. 몇 달 전 방문한 A씨의 집에서는 2시간 내내 세제로 바닥의 기름때를 닦았다.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한 김씨가 A씨에게 지나가듯 “오늘 정말 힘들었네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A씨는 보훈처에 전화해 “보훈섬김이가 왜 나한테 힘들다고 하냐”고 항의했다. 복지사는 되레 김씨에게 “일을 제대로 안 하고 온 거냐, 왜 민원 전화가 오게 하냐”며 면박을 줬다. 김씨는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하고 왔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허탈하고 억울하죠”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보훈대상자들의 편안한 노후를 지원하는 보훈섬김이들이 과도한 가사노동 요구와 ‘갑질’에 시달리고 있다. 김장이나 명절 음식 등 ‘일상생활 지원’을 넘어선 업무를 시키거나 폭언을 하며 모멸감을 주는 일도 잦다. 무리한 요구를 조정하고 보훈섬김이를 보호해야 할 보훈처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갑질을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루 6시간 고강도 노동에 보훈섬김이는 ‘골병’

“우리 집에 지금 ‘청소쟁이’가 와 있어.” 보훈섬김이 최정희(가명·62)씨는 몇년 전 한 국가유공자의 집에서 들은 이 말을 잊지 못한다. 전화 통화를 하던 국가유공자의 아내 B씨가 다른 사람에게 최씨를 ‘청소쟁이’라 지칭한 것이다. 고령의 국가유공자를 예우하는 마음으로 재가복지서비스를 해왔던 최씨는 모멸감을 느꼈다. 최씨는 “평소에도 청소하고 있으면 (B씨가) 옆에 앉아서 ‘저기 얼룩 있다’며 트집을 잡거나 사소한 일로도 화를 냈다. ‘네가 대통령이라도 되냐’고 뭐라 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최씨는 일주일에 세 번 B씨 집에 갈 때마다 모든 유리창을 앞뒤로 다 닦는 등 대청소를 했지만, B씨는 정작 보훈처에 ‘(최씨가) 일을 못한다’고 평가했다. 결국 최씨는 사유서까지 써야 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많은 보훈섬김이가 고강도의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보훈대상자는 물론 그 자녀까지 김씨를 아랫사람 대하듯 부리며 ‘갑질’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보훈섬김이는 “며느리나 자녀분이 보훈처에 전화해 ‘수도꼭지를 안 닦고 갔다’는 식으로 항의를 한다”며 “일을 시켜 놓고 ‘우리 며느리 전화 한 통이면 넌 끝난다’고 하는 어르신도 있다.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보훈섬김이들의 몸과 마음은 무너져가고 있다. 14일 국가보훈처노동조합에 따르면 노조가 지난달 조합원 6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9.5%가 가사 위주의 업무로 정형외과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50.4%는 ‘가사 위주의 서비스로 직업만족도가 저하된다’고 했다.

◆보훈섬김이 업무 범위 지침 유명무실…“보훈처가 갑질 방조” 주장도

물론 업무 범위를 규정한 지침은 있다. 보훈처의 지침에는 △가사활동(취사·세탁·청소 등) △건강관리(식사수발, 말벗, 치매 예방 등) △편의지원(병원동행, 산책, 심부름 등 외부활동 지원)이 명시돼 있다. 업무에 가사활동이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을 불편 없이 수행하는 데 돕는 정도다. 김장이나 명절음식, 대청소, 밭일 등은 원칙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란 얘기다.

그러나 노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보훈대상자가 요구하는 업무에 대해 ‘지침에 적혀 있는 대로만 수행한다’는 응답은 13%에 그쳤다. 46%는 ‘보훈대상자들이 원하는 일은 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답했고, 34.6%는 ‘원하는 업무를 거절했더니 대상자가 화를 내거나 지방보훈청에 민원을 제기한 경험이 있다’고 전했다. 한 보훈섬김이는 “무리한 요구를 해 못한다고 했더니 ‘그럴 거면 왜 오냐, 노인이 시키면 군소리 말고 하면 되지 계집애가 말대꾸한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무리한 요구는 보훈처 탓이라는 지적도 많다. 한진미 노조위원장은 “보훈처 공무원이 보훈대상자에게 ‘보훈섬김이는 막 부려먹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거나, ‘우리가 돈 주는 사람이니 청소를 빡세게 시키라’고 안내한다”며 “보훈대상자들은 ‘보훈처가 뭐든지 시키라 했는데 왜 말을 안 듣냐’는 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훈처가 업무 영역 등을 정리해 줘야 하는데 유공자에 대한 ‘예우’에 함몰돼 오히려 보훈섬김이에게 ‘왜 어르신 말을 안 들어주냐’고 탓한다”며 “보훈처가 갑질을 부추기고 방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훈처 관계자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 보니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것”이라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종민·이지안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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