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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의, 수치에 의한 민주화… 군부 야욕에 하루 새 ‘와르르’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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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4-11 11:00:00 수정 : 2021-04-11 1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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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민주주의, 왜 쉽게 무너졌나

수치, 1988년 혁명 때 주부서 민주투사 변신
2010년 15년 가택연금 해제… 민주화 전면에
2015년 총선서 압승… 문민정부 수장 올라
정부 요직 검증 안 된 충성파들 등용 실수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 두둔 결정타 작용
명예·명분 모두 상실… ‘민주화 어머니’ 퇴색
국제사회도 분개… 외국인 직접투자 급감

군부, 민간에 권력 넘기는 제스처만 하고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권력을 놓은 적 없어
“수치의 민주주의 뿌리 내리기 전 자르자”
쿠데타 일으켜 수치와 불편한 동거 청산
지난 2월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에서 군부 쿠데타와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감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린 가운데 한 시민이 군부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순식간이었다. 2월1일 새벽 미얀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윈민 대통령을 체포하고 날이 밝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4개 부처 장관을 경질했고, 11명의 후임자를 발표했다. 미얀마 민주주의 시계를 처음 쿠데타가 일어난 59년 전으로 되돌리는 데 하루면 충분했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2016년 출범한 수치 정부는 지난해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2월1일은 문민정부 2기를 시작하는 의회 출범일이었다. 그러나 개원을 몇 시간 앞두고 민주화의 여정은 모두 없던 일이 됐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한때 수치 고문을 ‘희망의 불빛’이라 불렀다. 이 불빛은 군부의 급습에 맥없이 꺼졌고, 동시에 미얀마도 어둠에 묻혔다. 미얀마 민주주의는 왜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걸까. 전문가들은 시스템이 아닌 수치 한 사람에 기댄 민주화가 문제였다고 말한다.

◆수치의, 수치에 의한 민주주의의 한계

1988년 8월8일 미얀마에서는 군정에 반대하는 이른바 ‘8888혁명’이 일어났다. 시위대는 그들의 뜻을 대변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1947년 사망)의 딸 수치에게 그들의 바람을 투영했다. 영국인 남편을 만나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살던 수치는 별안간 민주투사가 됐다.

이듬해 가택연금돼 정치적으로 손발이 묶이는 처지가 됐지만 수치라는 인물의 상징성은 국민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의 사진을 집에 걸어두거나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갇혔다 풀려나길 반복하며 총 15년을 집에서 보낸 끝에 2010년 최종적으로 가택연금이 해제됐을 때 그는 미얀마 안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마하트라 간디나 넬슨 만델라와 같은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연맹(NLD)은 2015년 마침내 의회 의석의 59%를 차지했다. 염원하던 문민정부 1기가 출범했지만 늘 느낌표가 따라붙던 수치의 행적에 이때부터 물음표가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지난 6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에서 반 쿠데타 시위대가 거리에 붉은 페인트를 뿌리고 있다. 양곤=AP·뉴시스

이제 구호가 아닌 정책을 내놔야 했지만, 수치의 주변엔 전문가가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문성보다는 충성심 높은 이들이 포진했다. 정부 요직을 검증 안 된 충성파들이 나눠 가지리란 우려도 현실이 됐다.

캬우 민 전 금융기획부 장관(2016∼2018년)은 브루클린 파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이곳은 대학이 아니라 파키스탄 소프트웨어 회사가 운영하는 가짜 학위 판매 웹사이트로 드러났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5년간 상무장관을 지낸 탄트 민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퍼시픽 웨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 의회 조사에서 학위 남발이 드러나 인가가 취소되고 2006년 폐쇄된 대학이었다.

졸탄 버라니 미 텍사스대 교수는 ‘저널 오브 데모크라시’에 게재한 ‘버마: 수치의 실수’라는 글에서 “그는 ‘88세대 평화 열린 사회’ 같은 주요 민주화운동 단체나 NLD에 협력했던 여러 소수민족과 손잡길 거부했다”며 “그는 선거운동 기간 ‘후보가 아닌 당에 투표해 달라’고 호소했는데, 이는 스스로 NLD 후보들의 결점을 인정한 셈”이라고 짚었다.

수치와 NLD 충성파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올해 76세인 그는 후계자 양성이나 당내 세대교체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을 방관하고 두둔한 건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는 2019년 미얀마 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로힝야 집단학살 범죄 관련 소송으로 국제사법재판소(ICJ) 피고석에 섰다. 30분간의 진술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로힝야’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무슬림, 사람들, 시민, 라카인 주민, 로힝야족구원군(ARSA)이란 말로 대신했다. 로힝야족 고유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집단학살은 내부 분쟁이라고 감쌌다.

미·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분개했다. 비난이 쏟아지고 외국인 직접투자가 급감했다. 미얀마와 서방의 벌어진 틈을 중국이 파고들었다. 중국이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 34건의 투자액은 240억달러(약 27조원), 2019년 미얀마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36%에 해당하는 규모다. 2월1일 쿠데타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경제 제재가 먹혀들지 않는 데는 이런 사정도 있다.

필 로버트슨 휴먼 라이츠 워치(HRW) 아시아담당 부국장은 뉴욕타임스에 “아웅산 수치는 본인이 인권운동가보다는 정치가에 가깝다고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둘 다 잘 해내지 못했다”고 했다.

2010년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기 전 수치 고문이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군부는 한 번도 권력을 놓지 않았다

이번엔 시선을 군부로 돌려보자. 군부는 어떻게 다시 권력을 손에 넣었을까. 사실 이 질문은 잘못됐다. 군부는 단 한 번도 권력을 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군정은 2007년 샤프란 혁명을 계기로 민간으로 권력을 넘기기로 한다. 군정 종식을 염두에 두고 다음해 헌법이 개정되는데 여기에 담긴 핵심 메시지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였다.

내무, 국방, 국경경비 등 주요 부처 장관과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국가방위안보위원회(NDSC) 위원 11명 중 과반인 6명을 군이 지명하도록 했다. 전체 국회의원의 25%는 자동으로 군부에 할당됐다. 이 같은 내용의 헌법을 고치려면 75% 넘는 의원이 동의해야 하는데, 의석의 25%가 군부 몫이기 때문에 사실상 개헌은 불가능했다.

지난 6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에서 우산을 쓴 반 쿠데타 시위대가 '빗물 시위'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양곤=AP·뉴시스

2015년 수치의 NLD가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군부의 경제상황도 나아졌다. 독재정권에 가해진 서방의 제재가 풀렸기 때문이다.

NLD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다. NLD는 출범 당시 핵심과제로 내걸었던 경제발전이 생각처럼 되지 않자 헌법 개정을 완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러나 2019년 군부 권한을 축소시키기 위한 개정안은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지난해에도 여당은 군부 배당 의석 수를 현재의 25%에서 2020 총선 이후 15%, 2025년 이후 10%, 2030년엔 5% 이하로 점차 줄이고 국경경비 장관 지명권을 가져오는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군부의 저항에 결국 개헌안 제출은 연기됐다.

2020년 총선은 이런 분위기 속에 치러졌기 때문에 NLD의 압승은 예상밖 결과였다. 미얀마 전문가들은 NLD가 총선 패배까지는 아니어도 2015년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둘 것이라 전망했다.

홍문숙 부산외대 교수는 ‘동남아시아연구’에서 “이런 예측은 수치의 대중적 인기를 간과한 것이었다”며 “비록 로힝야 문제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했지만, 대다수 미얀마인들에게는 (ICJ 재판이 열린) 헤이그에서 국가를 대변한 그의 모습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버마족뿐 아니라 다른 종족의 지지를 얻기 충분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다가왔다”고 분석했다.

군부는 수치 정부와의 동거가 더욱 불편해졌다.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한 건 수치의, 수치에 의한 민주주의가 더 깊이 뿌리내리기 전에 도려내자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1일이면 쿠데타 발생 70일째가 된다. 쿠데타 반대시위 사망자는 600명을 넘어섰고 국제사회의 규탄 성명과 경제 제재는 힘을 못 쓰고 있다.

김형종 연세대 교수(국제관계학)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쿠데타가 종식되더라도 수치 체제로의 복귀는 아닐 것”이라며 “희망을 찾자면 민족,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단결하고 있는 만큼 기존의 수치·버마족·불교 중심의 정치 지형을 넘어선다면 미얀마 민주주의도 한 단계 성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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