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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홍칼럼] 조용히 사라진 노병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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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25 21:06:45 수정 : 2018-06-25 23:4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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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통합의 꿈과 실천은/우리 손이 닿지 않는 선반 위에/3김 시대 끝났으나 양지와 음지/함께 품지 못하는 옹졸함 그대로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생전에 써 놓은 묘비명엔 노정객 인생 90의 깊은 내공이 녹아 있다. “사무사(思無邪)를 인생(人生)의 도리(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을 치국(治國)의 근본(根本)으로 삼아 국리민복(國利民福)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구현(具現)하기 위하여 헌신진력(獻身盡力)하였거늘/ 만년(晩年)에 이르러 ‘연구십이지팔십구비’(年九十而知八十九非)라고 탄(嘆)하며 수다(數多)한 물음에는 ‘소이부답’(笑而不答)하던 자(者)…” 평생 노력한다고 했으나 되돌아보니 이룬 것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 이룬 것이 없지는 않은 것임이 분명하다.

정치권 논평은 고인이 남긴 양지와 음지를 지적했으되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일치된 의견을 내놨다. 인색한 평가를 내놓을 것으로 보였던 정의당도 나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질곡마다 흔적을 남겼던 고인의 기억은 사료와도 같은 가치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가 김 전 총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한 것을 놓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훈장 추서를 반대한다는 게시글이 쏟아지고 있다. 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페이스북에 “실패한 인생이다. 가는 마당임에도 좋은 말은 못하겠다. 징글징글했다”라는 등의 쓴소리를 올렸다. 고인은 지하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에 그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다.

김기홍 논설위원
부침과 영욕이 교차한 ‘자의 반 타의 반’ 삶이었던 만큼 꿰맨 자국이 없는 옷처럼 완벽했을 리는 없다. 5·16 쿠데타를 발판으로 한국 정치사의 한 시대를 휩쓸고 다녔으니 ‘사무사’와 ‘무항산무항심’을 앞세웠다 해도 그 서슬에 차이고 밟힌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김 전 총리가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판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와 광복 후 좌우 분열, 6·25 전란, 군사정변, 경제개발, 민주화 시대를 숨가쁘게 거친 지난 100년은 격동의 역사였다. 질풍노도의 100년 공간에 머물렀던 사람에겐 유유자적, 독야청청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시대의 우리들은 시류에 기대 숱한 곁눈질로 버텨 왔다. 하물며 92년 가운데 40여년간 맨 앞에서 격랑을 일으키고, 한가운데서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하면서 풍파를 온몸으로 겪은 정치인의 삶은 남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기복과 변화가 심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의 이력 마디마디에 새겨진 공(功)과 과(過)도 그만큼 또렷할 수밖에 없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 전 총리를 조문하지 않기로 했다.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조문을 간 적이 없다”는 설명이 있었으나 행간의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낙연 총리는 문 대통령의 조문 문제에 대해 “제 견해로는 오실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일체의 사정을 제외하면 이 총리의 ‘견해’가 일반의 상식에 가깝다. 현직 대통령이 전례와 개인 인연을 핑계로 조문을 마다한 것은 여전히 과거 편견에 갇혀 있는 척박한 정치 현실을 드러낸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며 다짐했던 국민통합의 꿈과 실천은 아직 우리 손이 닿지 않는 선반 위에 놓여져 있다.

김 전 총리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최고의 가르침을 남겼다. “실업(實業)은 실업하는 사람이 열매를 따먹지만, 정치인이 열매를 맺어놓으면 국민이 따먹지 그 정치인이 먹는 것 하나도 없다.” 고인이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가족묘에 묻히는 것도 허업의 이치를 깨달은 때문인지 모른다. 정치가 갈등과 분열을 거듭하는 것은 정치가 과실을 챙기려 하기 때문이다.

김 전 총리의 별세로 3김 시대는 끝났다. 이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해야 한다. 공과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색안경을 벗지 못하면 우리는 3김 시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양지와 음지를 함께 품지 못하는 옹졸함으로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김기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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